고결한 피를 가진 이는 예로부터 많은 위협에 시달리곤 한다.
날 때부터 주목받은 생명. 까마득한 조상부터 제 아비까지 모두가 국가를 떠받혀온 고위 인사들. 말과 글을 깨우치기 전부터 토지와 하인을 가지고 있었던 제너럴은, 제가 처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순간이 언제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도련님의 목숨은 도련님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 가문의 것이고, 나아가 국가의 것이지요.’
유모의 말은 어린 것에게는 다소 부담으로 다가왔을지 몰라도, 제너럴은 의외로 그 사실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날 때부터 가진 것이 많은 이는 가진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시시하지만 중요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정신. 그 핏줄에 새겨진 고귀함은 소년을 빠르게 어른으로 만들었고, 주변의 모든 것들은 애어른이 된 소년을 지켜주었다.
좋은 환경, 흠 잡을 곳 없는 혈통, 타고난 성품과 지능. 마치 만들어 진 것 마냥 완벽한 소년은 이윽고 촉망받는 청년으로 자라났지만, 그의 영혼은 아직 완전히 여물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셨으니 마음에 빈자리가 클 거예요.’ 그를 어릴 때부터 돌봐온 유모는 제너럴을 볼 때 마다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린아이는 모름지기 어리광을 부리고 실수를 하며 자라야 하는 법인데, 완벽해야만 하는 제너럴은 스스로 어린아이의 권리들을 포기했으니 마음에 구멍이 난 채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하지만, 신조차도 이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도련님을 사랑했기 때문일까.
제너럴에게는 딱 하나, 자신의 완벽하지 않은 틈을 내보여도 괜찮을 안식처가 존재했다.
“도련님, 오늘 애프터눈 티는 다즐링입니다.”
따뜻한 햇살이 사랑스러운 오후. 저택의 화원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자신에게 온 편지들을 정리하던 제너럴은 다정한 목소리에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벌써 그런 시간이 되었나요?”
“시간이 참 빠르죠? 여기, 드시면서 하세요.”
한 쪽에는 따뜻한 차가 담긴 찻잔을, 다른 한 쪽에는 갓 구워온 과자를 놓은 메이드는 테이블 세팅을 마친 후 공손한 자세로 옆자리에 섰다. 보통의 메이드라면 이제 모시는 이의 티타임이 끝날 때 까지 기다렸다가 식기를 치우면 그만이지만, 그의 전담 메이드의 업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엔, 그러지 말고 앉으세요. 꽤 긴 티타임이 될 것 같고….”
“그래도 괜찮을까요?”
“네. 어차피 보는 눈도 없고, 있다한들 제가 허락했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허락도 없이 덥석 동석했다가는 바로 잘리겠지만, 주인이 먼저 권한 이상 동석도 죄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런 권유 자체가 처음이 아니었기에 별로 놀라지도 않은 메이드는 단 한번만 되물은 후 곧바로 맞은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
“…역시 티가 나나요? 정말이지, 당신에게는 감출 수가 없네요.”
하하. 허탈하게 웃은 제너럴이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거절하고 싶은 초대가 왔는데, 거절하면 안 되어서 고민이네요.”
“저런. 지위는 높지만 무례한 귀족이 먹고 즐기는 게 전부인 파티를 열었나 보네요.”
“정확해요.”
아무리 제 곁에 오래 있었다지만 저렇게까지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건, 본디 상대의 머리가 영민하기 때문이겠지. 제너럴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눈을 마주하고 있는 메이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역시 단순히 메이드 일이나 하기엔 아까운 인재다. 그를 처음 만난 15살 때부터, 제너럴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참석 후, 급한 일이 있다며 빠져나오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할까요? 그 수법, 너무 써먹어서 슬슬 눈치 챌 것 같지만.”
“하지만 실제로도 바쁘시니까 다들 반신반의 하는 거잖아요?”
“하하, 이럴 땐 바쁠 게 다행이라고 할지….”
하지만 이렇게 불평을 할 수 있는 것도 메이드 앞에서 뿐이다. 정확하게는 이 메이드, 루엔 앞에서 뿐이었지. 10년 넘게 함께하며, 동갑내기 친구로서, 입이 무겁고 충직한 종으로서 일해주고 있는 그 앞에서라면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라고 해서 처음부터 제 메이드를 전적으로 신뢰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갑과 을의 관계라고 해도 자신은 흠 잡힐 만한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 어차피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일은 대부분 집사가 도와주니, 집사 외의 사용인들에겐 완벽한 도련님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게 도련님의 의무였으니까. 15살의 그는 스스로, 혹은 주변의 눈치에 따라 그런 입장을 고수해 왔고 완벽하게 제가 내놓은 입장에 따라 행동해 왔다.
하지만 결국엔 그도 인간이라 실수를 할 때도 생기는 법이었지. 완벽의 강박을 가진 그가 처음으로 유모와 집사 외의 사람에게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 건, 감기 걸리기 딱 좋은 일교차가 큰 어느 가을의 아침시간 때였다.
‘그때 티스푼으로 글씨를 쓸 뻔 했고, 만연필로 차를 젓고 말았지….’
그동안 일해 온 고용인들이라면 제 행동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 있냐고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고용 된지 겨우 3달째 되었던 제 메이드는 작게 웃으며 잉크로 물든 차와 젖은 종이를 치우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피곤하시면 차 말고 코코아를 가져올까요? 피로에는 단 게 좋답니다.’
그건 실수 자체를 못 본 척 하는 게 아니었다. 그건 그저, 누구든 실수를 하니 제 도련님도 실수를 할 뿐이라는 당연한 수용이었지. 유모나 집사조차도 제 실수나 위태로움에 기겁을 했던 걸 생각하면, 루엔의 이런 반응이 제너럴에게 얼마나 놀랍게 다가왔겠는가.
‘실수해도 괜찮은 거였나.’
그때부터였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곤란할 것 같으면 곤란하다고 말하게 된 것은. 물론 그 진실의 말을 듣는 건 그의 메이드뿐이었지만, 입과 귀를 틀어막은 채 살던 제너럴에겐 단 한명이라도 소통의 대상이 생긴 것만으로 충분했다.
“아참. 도련님, 저녁 식사 후 어르신이 같이 산책을 하자고 권하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산책이라. 어제 그 일로 하실 말이 있으신 거겠지. 알겠다고 전해주겠어?”
“네, 그럼 집사님께 스케줄을….”
평온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부자연스럽게 끊긴다.
대답하다 말고 표정이 싸늘하게 식은 루엔은 부스럭거리는 소음을 내는 장미 덤불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엔?’ 제너럴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되묻기 무섭게, 그는 테이블 위의 물건들이 흐트러지지 않게 재빨리 일어나 치마 속에서 권총을 꺼냈다.
‘탕!’
“크악!”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발포에, 덤불 속에 숨어있던 수상한 그림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복면을 쓴 채 나뒹군 침입자는 총알이 박힌 허벅지를 지혈하기 위해 두 손을 제 다리로 가져갔지만, 루엔은 공격이 아닌 다른 행동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침입자의 왼팔을 쐈다.
“으아악!”
“며칠 또 조용하다 싶었더니, 어휴.”
‘후우’ 뜨거워진 총구를 입 바람으로 식힌 그는, 놀람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은 차를 들이키는 제너럴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눈치 채는 게 늦어서 미리 제거해 놓질 못했네요. 집사님을 불러올게요.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뭐, 하루 이틀 일이어야죠. 다녀오세요.”
“으음. 자객에 익숙해지는 건 좋지 않은데, 걱정이네요. 그럼….”
아직 열기가 완전히 식지 않은 총을 꽉 쥔 채, 메이드는 공격 수단을 잃은 침입자를 끌고 밖으로 나간다.
아아, 역시 단순히 메이드 일이나 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인재다. 제 부모님들이 ‘경호도 잡무도 다 가능할 사람’을 뽑는다는 조건을 걸지만 않았어도, 제 메이드는 군에서 훈장을 잔뜩 달고 살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데.
“…다행인가?”
물론 부모님의 고집 덕에, 자신은 둘도 없을 안식처를 얻긴 했지만.
곧은 걸음으로 화원 밖을 나서는 루엔을 지그시 바라보던 제너럴의 얼굴에는 안도의 미소가 피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