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누가 막내 공자라고?
동대륙에는 가장 큰 영토와 힘을 가진 현국이 있다. 깊은 역사를 가진 현국은 광활한 평야지대와 깊은 강을 끼고 엄청난 부를 챙겼으며, 그에 막강한 군사력까지 가지게 되자 야금야금 주변국을 정복하더니, 어느새 징제까지 외치게 된 나라였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중심이었던 공작가는 나아가 대공가가 되어 황제 다음으로 나라에 군림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깊은 역사와 다른 귀족가와는 차원이 다른 혈통, 지위, 권력은 오래도록 대공가에 밑받침이 되어주었다. 어쨌거나 현국은 막강한 권력을 가졌으니 따라서 현국의 귀족들또한 타 왕국이나 제국보다 암암리에 더 높은 직위를 가진 자들처럼 대접받아왔다. 특히 현국의 대공가는 타 국가의 왕보다도 높은 대접을 받았으며, 그 누구도 그런 상황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다 대공가는 엄청난 자금력으로 여러 사업을 추진해 왔는데, 무섭게도 하나같이 모두 성공을 거뒀다. 따라서 떨어진 콩깍지라도 얻어먹으려 모두들 그들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
그리고 그 대공가에는 총 4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첫째는 공녀요, 둘째와 셋째는 쌍둥이 공자이다. 그리고 마지막 공자는... 공자인지 공녀인지조차 알수없고 이름조차 숨겨진 채 베일에 싸여 데뷔탕트도 거치지 않은 숨겨져 있는 자식이었다. 모두들 그런 막내 공자(성별을 알 수 없지만 모두들 공자라고 칭하기 때문에 거의 굳어진 명칭이다)를 보며, 누구는 대공가의 사생이다, 누구는 주워온 아이이다라며 떠들기를 좋아하였다. 분명 이런 류의 소문은 시간이 지나면 수그러들었으나, 가문이 가문인지라 대공가의 막내공자에 대한 소문은 오히려 더 불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소문이 가장 크게 부풀려진 때는 대공가에서 주최하는 가면무도회였다.
가면무도회는 이름만 가면무도회일뿐, 모두들 누가 어떤 가면을 쓰고 오는지(가면이 겹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초대되는 지 등 이미 다 알고있다. 그렇기에 가면은 그냥 드레스와 같은 복식에 불과할 뿐 모두 무도회나 마찬가지라 생각하며 참석했다. 하지만 귀족 가문에서 주최하는 가면무도회도 사교의 장이지만 그곳은 그저 놀이터일뿐, 대공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두들 초대받고 싶어 안달을 냈으며, 황제조차 대공에게 슬쩍 언질을 주는 것을 보고 모두들 이번 가면무도회를 기대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초대장을 받았을 때 꿈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가문이 나름 문인으로 명망있는 귀족가문이지만 이 조차 이제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할 뿐, 권력이라고는 없는 변두리의 작은 귀족가다. 저 또한 아카데미를 나오고 공부와 무술 모두를 해봤지만 이미 거의 스러진 이름 가지고는 은연중에 퍼져있는 비리에 어쩌지 못했다. 그저 영지나 조용히 다스리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와서는 후작가인 작위로 몇번 사교계에 발을 들인 적은 있으나, 대공가에서 초대를 받을 만큼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이 초대장을 거절하지도 못하며, 편지가 잘못 온것만 아니길 빌며 초대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가면무도회는 정말 화려하고 호화롭고 눈부셨다. 세상의 모든 보석과 돈이 이곳에 모인 듯한 모습은 가히 절경이라고 칭해도 될만큼 아름다웠다. 모두들 그런 대공가의 위세에 눌린 듯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재빨리 무도회장 가장 구석으로 이동했다. 정말로 이 가면무도회는 명망있는 가문들만 모인듯 주위를 조금만 둘러봐도 쟁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저 분은 김 가(家)의 백작, 저 분은 이 가(家)의 후작과 둘째아들, 저분은 …. 가면 때문에 알아볼 수 없는 자들도 많았지만 모두들 이곳을 사교의 장으로 인식한 건지 자신이 티나도록 만든 가면을 쓰고온 자들도 많았다. 대공가에 도착할때까지만 해도 떨리진 않았지만 막상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니 그는 그의 행색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딜보나 쟁쟁한 인물들 밖에 없는데 이 곳에 아무 이름이 없는 그가 들어와 있다는 것 자체가 옥의 티 같아 그는 제 얼굴이 더 안보이도록 가면을 깊이 고쳐썼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을까 손님들이 다 들어왔는지 대공이 단상위에 섰다. 모두들 숱한 감사의 말이란 것을 알면서도 대공의 말이기에 떠드는 것을 멈추고 집중했다. 그리고, 대공은 그런 좌중을 웃으면서 훝고는, 폭탄을 터뜨렸다.
"이런 무도회에선 행사와 경품이 있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는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이내,
"이 곳에, 저의 막내 아이가 있습니다. 만약 그 아이를 찾으신다면, 대공가의 명맥에 맞는,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참, 가면을 벗기거나 벗으시는 것은 가면 무도회라는 규칙에 위반되니 모두 과하진 않게, 저의 막내 아이를 찾아주시면 되겠습니다."
그의 말은 큰 바람을 불러왔다. 모두들 막내 공자라는 말에 엄청난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대공가의 엄청난 선물이라는 말엔 눈에 불을 키고 막내 공자를 찾으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본디 즐기려고 했던 사교장은 어느새 시장통을 방불케할 시끄러움으로 가득 찼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리고 그에게 다가와 이름을 묻는 자들도 생겼다. 물론 이름을 알려주니 눈에 띄게 실망하며 가는 사람도 있는 방면, 자신이 누구인지 같이 소개하며 유쾌하게 떠느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막내 공자를 찾겠다며 어수선했던 무도회장이 어느새 직위와 가문을 잊고 자연스레 떠드는 곳을 바뀌었다. 그 또한 한참을 사람들과 떠들었지만 쉬고싶은 마음에 조용히 테라스를 찾았다.
대공가는 역시 대공가인듯 테라스로 보이는 정원조차 화려한 꽃들과 나무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빛이 나도록 깨끗하게 닦인 탁자에 앉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샴페인 잔을 든 채로 그냥 난간에 기대 밤바람을 쐬었다. 얼마나 나와있었을까, 어느새 샴페인을 다 비우고 다시 회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누가 커튼을 젖히고 들어왔다.
"...메이드?"
메이드 옷을 입은 여자는 저를 못봤는지 자연스럽게 의자로 걸어가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구두를 벗고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는 폼이 눈에 띄지않게 쉬려고 찾아온 듯 하다. 눈을 감는 것을 보고 다른 테라스를 찾아 쉬어야겠다 생각하며 조용히 나가려다 실수로 테이블을 걷어찼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메이드의 눈이 번쩍 떠졌다.
"헉"
누가 낸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둘다 깜짝 놀란 마음에 벌렁이는 심장을 잡고 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나갈테니 계속 쉬시지요."
그는 조용히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작게 잠깐, 이라는 말이 들렸다.
"어디의, 누구인지 들어도 될까요?"
조용히 눈을 바라보며 묻는 메이드의 모습에 왠지모를 어색함이 맴돌았다. 아닌 척 해도 말투와 눈빛에 들어있는 기품은 메이드 복을 입었다해서 쉽게 감춰지지 않았다. 그는 계속 존댓말을 고수하자는 생각을 하며 제 소개를 했다. 그러자 메이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후작.. 하고 중얼거렸다.
"후작님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이 성의 메이드 시아라고 해요."
조용히 인사하는 모습은 그녀가 그저그런 메이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줬지만 그는 아무말도 첨언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후작님만 괜찮으시다면, 여기 조금만 더 계시다가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들어온 것을 본 자가 있을수도 있으니까요."
후작님께 괜한 염문이 생기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조용히 말하는 모습에 그는 아무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드 옷을 입고 있는 기품있는 여자라. 누군지 전혀 추측가지 않았기에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혹여 정말로 성의 메이드라고 해도, 대공가의 시녀니 아무렇게나 대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지요."
답하고는 그녀가 나가길 기다렸으나 메이드는 한참을 그를 바라만 볼 뿐 일어서서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미간이 찌푸려지려는 찰나, 그녀가 입을 열었다.
"후작님께서는 왜 막내 공자를 찾지 않으십니까?"
생뚱맞은 질문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일개 메이드의 옷을 입고있는 여자가 (이름뿐이라 해도)후작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것을 넘어서 (빨리 나가지 않고 제 쉬는시간까지 방해하며)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모습에 자연스레 눈쌀이 찌푸려졌다. 자동적으로 존댓말의 어미가 떨어졌다.
"그리 묻는 이유를 모르겠군."
"음... 회장에서는 모두들 선물을 위해 대공님의 막내 공자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는데, 후작님께서는 대공님의 선물을 바라지 않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대공가의 명맥에 맞춘 선물이라면 후작님이 상상도 못할 것들을 얻으실 수 있을텐데요?"
"필요없다. 선물보다 지금 쉬는 시간을 더 원한다만."
그도 대공가의 선물을 원하긴 했다. 그 명맥에 맞춘 선물이라면 제 이름을 높이는 것도 모자라 가문의 이름도 높여 원래의 명망있는 가문의 이름을 되찾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막내 공자를 찾는 것이라니. 성인이 되도록 모든 정보를 숨겨서 키운 막내 아이를 이름도 성별도 아무것도 모른 채 어찌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동안 숨겨왔던 이유또한 있을 것이다. 그러니 찾아내서 묘한 사건에 휘말리는 것 보다 그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라도 완벽하게 지켜야했다. 그렇기에 그녀에겐 빨리 나가달라 넌지시 말을 돌렸지만 그녀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건지 오히려 활짝 웃었다.
"당장의 쉬는 시간을 더 원하시다니. 미련하다 해야할지 아님 대공가의 명맥을 모르는 자라 생각해야 할지.. 후작님께서는 참으로 신기하신 분이군요."
못알아들은게 분명하다. 중간에 어물어물 말을 먹기는 했지만 그의 귀는 한글자도 빼놓지 않고 다 잡아챘다. 화가나 입을 여는 찰나 그녀가 먼저 선수쳤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죠. 특이하신 후작님"
그리고는 언제 어물쩍거렸냐는 듯 쏜살같이 테라스를 나가버렸다. 허..하고 허탈한 웃음만 터졌다. 화가 나서 찾으러 나간다고 해도 사람들 속에 숨어 들거, 쉽게 찾을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헛웃음만 짓다가 비워진 컵을 들고 테라스로 나왔다. 갑자기 피곤해진 정신을 다잡으며 빨리 무도회가 파하기를 속으로 빌었다.
***
"무슨 생각을 해?"
"아가씨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는 딴생각을 했다 너무 당당히 밝히면서 여자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꽃병의 꽃을 정리하더니 여자의 손에 신문을 쥐어주고는 차를 따랐다.
"차는 간단하게 얼그레이 티와 디저트로는 치즈케이크를 준비했습니다. 아가씨께서 좋아하실만한 내용은 2면, 6면에 있습니다."
트레이 속의 치즈케이크를 꺼내 그녀 앞에 놔두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여자는 신문을 천천히 넘기면서 그에게 발을 내밀었다. 플레이팅을 마친 그는 조용히 무릎을 굽혀 그녀의 발을 제 허벅지에 올리고는 구두 끈을 묶었다. 다른 쪽 구두 끈까지 다 묶자 그는 일어서서 그녀가 반쯤 먹은 홍차를 다시 채워넣었다. 그러고는 한발짝 물러나 서있자 신문을 보고있던 여자는 그에게 신문을 건네고는 치즈케이크를 한스푼 펐다.
"그래서, 그 때 감상은 어땠었어?"
당돌한 메이드를 만났을때 말이야. 웃으면서 그녀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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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사실 알고보니 대공가의 막내 공자는 공자가 아니었다. 공녀였다. 그것도 제가 테라스에서 만난, 제 속을 뒤집고 떠난 메이드였다. 그날 무도회가 파할때까지 아무도 파티의 주인공을 찾지 못했고, 끝나갈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공자가 누구인지 찾기 보다 빨리 밝혀 궁금증을 없애주기를 바랬다. 그리고 파티가 끝나기 약 30분전 대공이 아닌 누군가가 단상위에 올라갔다. 메이드 옷을 입은채 가면도 쓰지 않고 한손에는 옮기다 만 접시까지 들려있었다. 끙차 소리를 내며 접시를 단상 한 구석에다 두고는 그녀는 가운데로 나왔다. 모두들 그 메이드를 보고 기함을 하며 빨리 내려오라 독촉했다. 감히 이곳은 대공가에서 주최하는 가면무도회, 단상은 대공가의 일원들에게만 주어지는 높은 자리였다. 빨리 기사를 데려오지 않고 무엇을 하는거냐 외치며 사람들은 소란스러워졌다.
그는 정말 깜짝 놀랐다. 테라스에서 만난 메이드가 제 속을 뒤집더니 이젠 미친짓까지 저지르는 것을 보아 정말 미친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저러다 하루아침에 죽게 될지도 모르는데... 단상 위에 올라가는 것은 죽음을 감수할 정도로 명예로운 일은 아니었다. 걱정과 당황스러움으로 그도 모르게 그녀에게 내려오라 외쳤다. 그러자 그녀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제 치마를 잡으며 귀족식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제 곧 무도회가 파할 시간이 되어 이렇게 인사를 하러 올라왔어요. 제 이름은 시아. 여러분이 찾아 헤매시던 대공가의 막내 공'녀'입니다."
소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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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였습니다."
단답으로 대답하자 그녀는 깔깔 소리내며 웃었다.
"거기다 제가 맞췄다고 공인까지 하시니, 더 싫었습니다."
"그럼 어떡한담? 내가 마음에 들었는걸."
웃으면서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따라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여기 서있지 않습니까?"
제 직업이 집사가 될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지요. 작게 덧붙이자 그녀는 더 크게 웃었다.
"그래서 마음에 안들어 도하 후작님?"
"아뇨. 그럴리가요. 집사는 제 천직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아 메이드님."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됐어. 홍차 한잔 더 줘. 네 아가씨. 대공가의 고즈넉한 꽃밭은 어느새 막내 공녀의 밝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