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단은 지독하게 잔인한 남자였다. 사람의 목숨을 아낄 줄 모르고 죽이는 데에만 기꺼워하는 이.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짐승을 받아준 건 린이였다. 거대한 저택에 갇혀만 사는 가여운 아가씨. 아가씨는 연회에서 돌아오는 날 밤. 마차의 창문 틈새로 어스름히 보이던 핏빛 눈동자를 한 사내를 보았고, 그를 거둬들였다. 히단은 밤색 머리카락을 한 순진한 아가씨의 목이 너무나 가늘어서 금방이라도 제 손으로 꺾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것만 같던 린은 그 남자를 서서히 자신의 사람으로 길들이기 시작했고 히단은 그 아가씨에게 점점 스며들어 갔다. 감옥같이 어둡고 컴컴한 저택은 묘하게 차가운 분위기가 들어서, 그 안에 갇혀사는 공작의 딸은 언제나 밀랍 인형처럼 창백했다. 이따금, 린은 히단에게만 옅은 미소를 보여주곤 했다. 그리고 그 미소는, 둘이 함께 있는 시간처럼 점점 많아졌다.
" 아가씨는 왜 여기에만 갇혀 사십니까. "
" 이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고 내가 지내야 하는 곳이니까. "
" 바깥세상이 얼마나 즐거운데! 아가씨는 가로등 켜진 밤길도 안 걸어보고, 저 시내 앞에 있는 구두 가게도 안 가보셨지. 요 앞에 있는 정원 나가는 게 고작인데. 그러다가 아프면 어쩌시려고. "
" 언젠가, 언젠가.. 누군가와 결혼하게 되면. 이 집에서 나갈 수 있겠지. 히단. 너는 내가 마치 새장 속의 새인 것 마냥 구는구나. 네 눈에도 내가.. 가엾니? "
" 아니,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
" 가여워 보이는 구나. 이 내가. 히단의 눈에는 가여워 보여서.. 이걸 기뻐하면 안 되는 거겠지. "
어색하게 이마를 긁적이는 히단을 향해 매끈한 새틴 드레스를 입은 린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저를 향해 뻗는 린의 그 손이, 제 뺨에 닿은 따스한 그 손이 떨어지지 않고 영원히 어루만져줬으면 하고 히단은 속으로 갈망했다. 아가씨의 작은 손이 움츠리며 집사의 뺨에서 떨어지자, 집사의 표정에 찰나의 순간 동안 아쉬움이 스쳐 지나간다. 언제나 돌처럼 굳어있던 사내의 눈동자는 조금씩 떨렸다. 아가씨의, 린의 백합 같은 체향이 둘만이 있는 방안을 메우고 있었다. 그 순간 정적이 흐르는 방안에서 히단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 아가씨는 행복해? 이 답답한 저택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그러고는 나중에 팔리듯이 남에게 가버릴 텐데! 그러지 말고 차라리, 좀 더 바깥으로 나가서 세상 구경도 하고.. 아가씨의 삶을 살란 말이야! "
" ..행복해. 내가 있는 곳이 이 저택이더라도. 히단이, 내 옆에 영원히 있어 준다면. 영원히. 그러면 행복할 거야. "
" 린! 고작 내가, 이 히단이 옆에 있어 준다면 행복하다는 거야? 네가 이 빌어먹을 저택에 계속 있는 한이 있어도? 하. "
히단의 얼굴이 종이짝마냥 일그러진다. 씩씩대며 회색빛 머리칼을 마구 헝클였다. 집사는 아가씨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저를 향해 웃는, 저를 향해 손을 내미는 그 아가씨가 좋았다. 떠돌아다니던 나를 거둬들인 이, 이 마을에 뜬 달, 공작의 아름다운 여식, 나의 아가씨. 시라유리 린. 어쩔때는 꼭 저가 삼류애정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히단은 린이 이 어두운 저택에 갇혀만 살다가 다른 이에게 억지로 이끌려 사라져버릴 거 같아서. 화가 났다. 그리고 두려웠다. 아가씨는 불퉁한 표정의 제 집사를 바라봤다. 린은 이 솔직하고 제멋대로인 사내가 좋았다. 자신이 데려온, 이 저택에서 오로지 자신만의 것. 히단과 함께 이 감옥 같은 저택에서 영원히 살다가 죽어도 좋을 거 같았다.
" 이리 와 보렴. 히단. "
" ..... "
" 또 토라졌구나. 너는 참 솔직하지. 가끔은 이렇게 내 말도 안 듣는 나쁜 집사고. "
작은 한숨을 쉬며 린은 휘황찬란한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아가씨는 집사에게 소리 없이 다가간다. 히단은 저에게 다가오는 린의 모습이 꼭 꿈결만 같았다. 촛불의 일렁이는 빛에 비치는 린은 지는 해의 황혼과도 같다. 은은하게 빛나는 샹들리에의 유리세공에 둘의 모습이 비쳤다. 린은 히단을 제품으로 부드럽게 안았다. 번지는 따뜻한 온기에, 히단은 붉어진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 채 가는 허리를 끌어안는다. 그리고는 린의 체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아가씨는 얇은 팔을 뻗어 더듬으며 촛대의 불꽃을 덮개로 꺼버렸다. 어두움이 닥치자 집사가 당황한 듯 아가씨를 더 세게 끌어안자, 어둠에 익숙한 아가씨는 그런 집사가 귀엽기만 한 듯 등을 토닥였다.
" 하하. 이렇게 불을 꺼버려서 너를 못 보게 하는 아가씨가 더 나쁘지 않나? "
" 집사도 아가씨도 둘 다 나쁘니까 없던 거로 치는 거 어때? "
" 음흉하게 시리. 겉은 얌전하게 생겼는데, 이렇게 분위기 조성하는 우리 아가씨도 보면 속이 하얗지는 않아- 안 그래? "
"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제멋대로인 우리 집사씨. 이제는 존댓말도 잘 안 쓰고. "
" 뭘 두고 본다는, ㅇ..! "
어둠 속에서 린이 히단의 얼굴을 더듬다가 갑작스레 깊게 입을 맞춰왔다. 이번이 처음이 아닌 키스였다. 린은 입을 맞추며 처음으로 히단과 정원에서 했던 키스를 떠올리던 순간, 히단이 제법 거칠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아가씨와 집사는 선을 넘는 것은 금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그 선을 넘고 싶었다. 더 서로를 향해 갈증을 느끼고 원했다. 말캉한 린의 입술을 물어뜯듯이 입을 마추던 히단이 천천히 투박하고 큰 손으로 가녀린 몸을 감싼 새틴을 더듬기 시작했다. 린은 본능에 솔직한 히단을 칭찬하듯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결코 짧지 않은 시간 후에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자, 린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히단은 목이 타는 것만 같았다. 제 앞에 있을 린이 너무나도 좋아서,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 후우.. 린. "
" 사랑해. 히단. "
" .. 엉? "
" 히단. 아무래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 거 같아. "
" 어.. 사랑? 아, 아가씨가?! 나를? 린. 너.. "
히단은 머리통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현기증이 났다. 린이 나를 사랑한댄다. 이 아가씨가. 나의 사랑스러운 아가씨. 어두워서 앞이 안 보였지만 분명히 린의 창백한 뺨은 장미같이 붉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히단은 벅차오르는 행복감에 씩 웃었다. 린은 그런 히단에게 몸을 기대며 영원히 같이 있자며 속삭였다. 히단을 사랑했다. 밖으로 나가지 못해도 좋았다. 이 만남이 언제까지고 계속 될수만 있다면 린은 행복했다. 히단이 저에게 사랑한다며 그 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들으며 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언제까지나, 아가씨와 집사로 남아도 좋으니. 당신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