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새로운 은신처는 벨마이어 공국 북부의 엘븐가드에 숨겨져 있었다. 오래되어 시들시들한 덩굴이 출입구를 쉬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은폐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 곳을 은신처로 지정하고도 그가 오래도록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들 중 하나였다고 확언할 수 있겠다.
기왕이면 버드나무 줄기나 등꽃 같은 게 더 로맨틱했을 텐데. 그러며 그는 내 머리카락 위로 툭 내려앉은 작은 벌레를 털어내주었다.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을 빈말이라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진담이었는데도. 파리가 날리는 고깃덩이도 음식이라고 허겁지겁 먹어치우던 시절에 비하면 머리에 벌레 따위가 하나 떨어지는 것 쯤 무엇이 대수라고 저러는 걸까. 그는 나를 귀하게 대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가씨의 손바닥만한 작은 발에 구두를 신겨주는 것처럼. 이 은신처는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더 이상 제국의 비호를 받지 못하는 나는 옆구리에서 내장이 쏟아져나올 것 같을 때마다 언제나 여기에서 목숨을 이었다. 그는 피칠갑을 한 내 갑주를 다다음날이면 마치 새 것처럼 만들어다 준비해놓았고, 은신처를 벗어나 다시 여로에 오르기 전 내 머리를 묶는 것도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건, 글쎄. 너무 거창한 것 아닌가.
“왜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어요, 얼어죽은 시체 같네.”
“제법 힘을 주어 차려입었군 그래.”
“사용인이라도 된 것마냥 군다고 저번에 말한 게 누군데 그래요?”
“딱히 사용인을 원한다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너무 깐깐하게 말하지 말아주세요. 오늘 딱 하루만 하고 말 거니까.”
기실 그의 모양새를 보며 거창하다고 느낀 까닭이야... 간단했다. 시선을 떼기 힘들었으니까. 검정에 가까운 자색이 어우러진 연미복이나, 목을 나비모양으로 휘감은 리본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백은색 갑주를 걸치며 전장을 누볐던 그를 잠깐 회고했다. 구태여 말하자면, 사실 이 쪽이 보다 그에게 더욱 잘 어울렸다고 해야 할까. 내가 걸치는 갑주는 나야 착용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기실 벗기가 꽤 까다로운 타입이었는데, 그가 내 가슴과 어깨 쪽의 단단한 이음 벨트에 손을 올릴 때에도 일말의 거부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처음이, 마치 몇 년 간 이런 일을 해온 것처럼 그의 손길은 가치러운 것을 몰랐다. 어린 시절 기억 같은 건 다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문득 이 단어가 떠올랐더랬다. 어머니. 흙투성이가 된 셔츠를 벗기고 깨끗한 새 옷을 입혀주던. 그가 건네준 셔츠는 안감이 따스했고 그 안에서는 희미한 열기가 감돌아 기분이 좋았다. 갑주 안의 옷감은 언제나 따스하게 받쳐입었지만, 이따금 차게 식은 갑주의 금속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잽싸게 몸의 열기를 뺏어가곤 했었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 추위에 지쳐있었던 것 같다.
“뜨겁진 않죠?”
“...그래. 따뜻하군.”
어디까지나 몸을 잠깐 은닉해 그리 길지 않은 사나흘 간을 보내기 적합하게끔 만들어진 곳이었다. 낡은 테이블은 언제나 야트막하게 먼지가 쌓여있었고 그 모서리가 닳아서, 살며시 만져보면 닳은 나무 안쪽이 포슬포슬 손끝에서 비벼졌다. 그도 나도 체격이 상당히 있었기에, 좁은 침대에서 체온을 부대끼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최소한의 의식주만이 굴러다닐 뿐인 은신처에서 이런 번지르르한 차림을 해봤자 이질감밖에 들지 않는데. 그래도 그는 모처럼의 이 귀족집 자제 수발을 드는 집사 놀이가 꽤 맘에 든 것 같아서, 잠자코 그가 하는대로 따라주기로 했다. 짐짓 교양 있는 걸음걸이로 내 앞에, 고기가 잔뜩 든 스튜를 건네주었을 때는 그가 정성스레 아래에 깐 냅킨을 보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추운 기후 탓에 싱겁게 간이 조절된 음식을 연달아 먹어와서 그런지, 살짝 짭조름하게 혀 끝을 녹이는 스튜의 맛은 좋았다. 살짝 입술에 국물이 묻으면, 그는 손수건을 맵시있게 꺼내 입술을 문질렀다. ...뭐, 사실 이런 건 자주 있는 일이기는 했다. 수쥬 같은 국가에서 파는, 쌀이라는 곡물을 뭉쳐 만든 주먹밥 같은 걸 먹을 적에. 휴대가 가능하면서도 충분한 포만감을 채워주는 전투식량이라는 느낌이라서. 그 때마다 그는 제 주먹밥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도 않고 내 얼굴만을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가끔 그 밥풀이 입술이나 뺨에 묻을 때마다 바로 그것을 떼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식사를 다 마치고 난 후에야 제 몫의 음식을 꾸역꾸역 넘기기 시작했으니까.
단순히 나를 배려했다기보다는, 이건 어쩐지-...
“이런 생활이 훨씬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런가? 뭐, 남 수발을 드는 일은 익숙하긴 하죠. 좋아하는 사람의 수발을 드는 일이라면 더.”
“...새삼스레 그런 생각이 들어. 너와 꽤 오래 알고 지내온 것 같은데, 생각보다 난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저 또한 당신에 대해 잘 모르죠. 우리 중 가장 말이 없었으니까. 근데 뭐,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알 것 같기도 해요.”
“맞출 수 있나, 그런 걸.”
“음, 역시 사냥꾼?”
“이유는?”
“감으로요. 걸음마랑, 활과 화살을 쓰는 법을 동시에 배웠을 것 같은 이미지랄까.”
“...감이 좋군.”
과연, 그 말대로였다. 아버지의 얼굴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언제나 집의 문을 나서던 그가 걸치고 있던 북슬거리는 털가죽과 활의 곡선 모양만은 마치 어제의 일인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사냥하던 것보다 조금 더 덩치가 있고, 흉포하고, 살상력이 대단한 것을 상대한다는 것만이 다를 뿐. 아버지의 파편을 답습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사람의 파편이라면.
“너는 무슨 일을 했어?”
“장미가 아름답게 핀 정원의 집사 일을 했었죠. 지금은 덩굴이 이리저리 찢어지고 담도 허물어졌겠지만.”
“익숙해질만도 하군.”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 있어요.”
“이를 테면?”
그의 입술이 희미하고, 다소 유쾌롭게 비틀린다. 단지 그것만으로, 그가 답습한 과거와 현재의 근소한 차이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에 반드시 필요치만은 않은 기이한 불순물이, 나를 향해 있었으니. 괴물의 피로 목욕을 하는 사냥꾼 따위에도 충복하는 집사란 건 꽤 골치가 아프다.
그래도, 별수 없는 것을 알았다. 공범자의 침대는 외롭고 상냥하지 못하며 비좁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