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합작_치토_소노다 치토.png
46_i.png

※드림주─치토는 마계에서 내려 온 마법사.

※원작과는 관계 없는 AU 서사로 진행됩니다.

 

 

 

 

 

 

 

 

 

 

어린 나이의 소년이 모든 것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고아였던 자신을 주워 기르던 노부부가 사고로 인해 사망하고, 아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는 데다 노부부 쪽의 친척 또한 소년을 받아 줄 리가 없었다. 장례식이 끝난 그날, 소년은 신발을 구겨 신고 달려 나왔다. 조그마한 시골 동네를 벗어나는 건 금방이었지만, 길을 따라 달리니 나온 산의 오르막길은 소년을 지치게 만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젓가락마냥 얇은 두 팔과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고, 많은 나무와 돌길 탓에 생채기가 나 피가 흘러 두 다리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결국 힘 없이 주저앉아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은 이미 낡아빠진 저택이었다. 분명 주저앉기 직전, 소년이 본 것은 계속된 길이었을 터인데, 어째서 갑자기 이 넓은 터전과 저택이 나타난 건 어째서인가. 환상이라고 오해해도 어려울 것 없는 데다, 시골 동네서도 그 어떤 소문도 없이 자리를 지켜 왔다는 점이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이 거대하고 낡은 저택이 소년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 순간, 무언가의 이끌림이었다. 소년은 저택의 대문을 향해 기어갔다. 감각을 반즈음 잃은 두 다리에 돌이 박히고 나뭇가지에 쓸리는 것은 당연히 알아차릴 수 없었다. 계단을 기어 올라가니 손에 닿지도 않은 대문이 이상하게 떨리다가,

끼기긱. 대문이 열리는 소리는 가히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허나 그 문을 연 저택의 내부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만큼 화려한 저택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밖에서 보는 것 이상으로 더 거대하고──아니, 광활하다는 표현이 맞을까. 내부로 기어들어오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닫혔다. 바람에 의해 자연스레 닫힌 게 아니라는 것즈음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왔네.”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과 같은 갈빛의 머리칼─허나 길이는 매우 길어서,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과 붉은 눈망울을 가진 소녀였다. 비슷한 체구에 비슷한 눈꼬리, 척 보면 남매라 오해 당할 수 있을 만큼 닮아 있었다.

 

“결국엔 나에게 올 운명이었던 거야, 유메노 군.”

내 이름을 어떻게,

“난 이미 당신을 알고 있으니까. 내 이름은 치토, … 그럼 잘 부탁해요.” 

 

 

 

 

폐쇄적인 생활이었다. 열세 살에 이 저택에 오고 어느 덧 11년이 지났다. 처음 저택의 모습을 본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이곳에서 나갈 수 없었기에─허나 무작정 이 장소에서 나간다고 한들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지금 와서 현실 세계가 자신에게 익숙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나갈 의향 또한 조금도 없었다─ 겐타로는 무미건조한 한숨을 쉬었다. 이 광활한 저택은 창문이라곤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꽉 막힌 장소였다. 환기를 하고 싶다고 처음 몇 달은 이야기를 했었으나, 치토는 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저택의 공기는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다며 의기양양하게─11년을 이곳에서 지낸 바로는 전혀 문제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려니 넘어 가기로 했다─ 말했다. 

결국, 이 넓은 저택에 청소를 하는 사람이라곤 겐타로뿐이었으나, 어째서인지 저택은 먼지 한 톨 쌓이지 않고 비정상적일 정도로 깨끗했다. 도대체 이 웅장한 저택을 관리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뭐, 마법사 겸 저택의 주인인 치토가 소환한 유령? 아니면──아니, 됐다. 이런 시답잖은 것에 대해 길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겐타로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물론 이런 장소에 있으면 영양가 없는 망상이 8할을 차지하지만 그것을 머릿속에서 풀어 나가지 않았다. 겐타로의 취미 중 하나는 망상에 따른 글을 이야기로 짜 공책에 적어 내리는 것이었다. 이미 그것으로 만들어 낸 소설만 몇 권이 넘어 가는지 더 이상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도 읽어 주지 않을 책을 이렇게나 열심히 쓰는 이유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뭐, 메이드의 본분─이라곤 해도 치토의 외출 준비를 돕거나, 가벼운 (의미 없는) 청소 등이 전부였지만─ 또한 잊지 않았으니 된 거 아닌가.

써 내린 책을 치토에게 권유하려 했으나, 처음 그 취미가 생긴 2년 동안은 자신의 필력이 부끄러워 선뜻 보여 주기 어려워했으며, 치토 또한 학교 생활도 제대로 보내다 만 열다섯 살즈음 된 소년의 글이라곤 크게 기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겐타로가 열일곱즈음 될 시점이었을까, 우연히 그의 노트를 발견한 치토가 소설의 일부로 보곤 그날 밤 겐타로에게 소설의 결말을 궁금해했다. 유메노 겐타로가 이 저택에 와서 가장 밝은 웃음을 지어 낸 날이었다.

치토는 겐타로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갖다 주었다. 그를 이 외지고, 텅 빈 저택에 데리고 있게 하는 만큼 그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 주기 위함이라는 것즈음은 당사자인 겐타로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진 알 수 없지만 치토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나가, 똑같은 시간에 들어왔고, 그 시간 동안 그가 지루해하지 않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연락망까지 마련했다. 그가 쓴 소설에 관심을 가진 것 또한 처음 일이 년간은 매일 대화를 나눌 정도였지만, 점차 그녀가 바깥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십일 년이 지난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이야기가 나올까 말까 할 정도였다.

시답잖아. 겐타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두 시간 전에 그녀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아직도 답이 없었다.

 

 

치토는 스스로 인간계가 아닌 마계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모두가 대답을 하긴커녕 비웃을 것이 뻔했다. 어찌 하여 철거되지 않은 건지 알 수 없는, 외부는 심각하게 낡았으나 내부는 그 어떤 장소보다 더 화려한 저택, 자신을 안다는 듯이 기세등등하게, 친한 척 말을 거는 한 어린 소녀, 갈 곳이 없어 도망치던 소년이라 한들 쉽게 신뢰할 수 없었고, 신뢰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이득될 일이라곤 어느 하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도 모르는 사람의 말은 믿는 게 아니라고들 하지만 지금의 겐타로가 처한 상황은 너무나도 처절했다.

그렇게 계속 날 경계했다간, 당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이곳마저도… 잃어 버릴걸.

협박 아닌 협박. 겐타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치토를 좋아할 수는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이 과연 저택일까, 감옥일까. 이곳의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겐타로는 많은 것에 놀라기만 했다. 치토의 이상한 취향인 건지, 겐타로가 소년이라는 점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메이드복을 권했다. 너무 길어서 돌아다니는 도중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배려한─스스로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 시절의 겐타로는 그대로 믿었지만, 지금 와서도 길이가 그대로… 아니, 조금씩 짧아지는 걸 봐선 순전히 그녀의 취향인 것 같아 보였다─적당히 짧은 길이의 스커트, 새하얀 프릴 원피스… 프릴에 리본까지 달린 머리띠. 바지는 없느냐고 물어 보았으나 치토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때도 겐타로는 생각했다. 절대 치토를 좋아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11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존재는 베일로 싸여 있었고─그녀는 하나하나 설명해 줄 의향이 있었으나, 평범한 인간인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알아 가기를 거부했다─, 루즈한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겐타로는 하나도 지치지 않았다. 치토가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는 것즈음은 몇 년 지나지 않았던 시점에서부터 가볍게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치토는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성장하지 않았다. 마법사와 인간의 수명은 다르다며 태연하게 말했으나, 만일 자신이 일찍이 죽는다면…… 그녀는 또 이 저택에 혼자가 되는 건가. 확실히 외톨이였던 그녀에게 마치 구세주라도 온 듯이 치토는 겐타로를 소중히 여겼다. 옛날에 만나 보기라도 한 듯이 늘 친근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점차 치토를 향한 불편한 감정은 누그러져 갔다.

아니, 확실히 말하자면… 그래,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다. 이건.

 

“청소할 필요 없다고 몇 년째 말하는 것 같은데.”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걸레로 닦던 겐타로를 발견한 치토는 자신의 몸을 가볍게 띄워 그의 목에 자신의 두 팔을 감았다. 귓가에 속삭이는 치토의 행동에 겐타로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귀여워라. 치토의 한마디에 겐타로는 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까지도 익숙해지지 않는 말 중 하나였다. 처음 만났을 적만 해도 겐타로는 치토보다 작았지만, 지금은 170 후반에 달하는 어엿한 청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토는 겐타로를 계속해서 귀엽다는 둥, 예쁘다는 둥 갖은 칭찬을 반복해 왔고, 처음 권유했던 메이드복 또한 변하지 않고 체구가 커져 가는 것에 따라 사이즈가 커져 옷을 가져올 때도 바지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겐타로가 바지를 입을 수 있는 순간은 오로지 수면을 취할 때뿐이었다. 물론 치토 또한 스스로를 귀엽다는 둥 이야기했으나, 마치 자신보다는 당신이 귀엽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어투가, 겐타로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소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이 잘 가질 않아서요.”

“그래서 어제 책도 잔뜩 가져왔잖아. 혹시… 글의 영감도 다 떨어져 버린 건가?”

“혼자 있기만 하면 머리든 마음이든 점점 비어 가기 마련이거든요.”

 

치토가 자신을 위해서 많은 것을 챙겨 주고 있다는 사실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이런 저택에 가둔 만큼 치토가 자신과 함께해 주기를 바라는 겐타로였다. 물론 치토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강제적으로 이 저택의 생활을 강요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 주어야 할 입장이었지만 최근 들어 저택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지며, 치토도 제법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것을 보아하니 바쁜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말을 꺼내는 데에도 오랜 고민이 필요했다. 앞서 말했듯 치토에게도 자신만의 사정이 있어 바쁘고, 힘들 텐데 그것을 무시하는 발언이 될까 봐 걱정했던 것이었다.

 

“알고 있어요, 내 탓인걸. 바빠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안 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겐타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려 달라는 말을 들은 지도 몇 달이 지난 것 같지만, 그것을 재촉할 정도로 겐타로의 마음이 굳은 것은 아니었다. 치토의 두 팔을 풀지 않고 걸레를 제자리에 두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발걸음은 자신의 것이 전부였다. 아직까지도 치토가 마법사다운 행동을 하는 것에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욕실로 들어가 두 손을 씻을 때까지 치토는 계속해서 겐타로에게 붙어 있었다. 실은 서로 지금 이 순간, 이 행동 하나하나에도 제법 만족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둘이서 보내는 시간이란 그만큼이나 소중했다. 내심 겐타로도 그녀가 팔을 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고, 치토도 두 팔을 풀 마음은 없는지 팔에 쥔 힘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삼 년 전부턴 아무 말도 안 하더라, 그 옷.”

“치토가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거든요. 매번 어울리는데 왜 그러느냐고 하잖아.”

“집사보단 메이드라는 거지. 그게 더 어울려요. 아니면 기모노라도 준비해 줘?”

“됐어요.”

 

그래, 이런 장난스러운 대화를 한 게 몇 주만이더라. 거실로 나와 겐타로는 의자에 앉았고, 치토는 그제서야 두 팔을 풀고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다. 겐타로의 얼굴을 보자니 웃음기가 도는 것을 보니 치토도 따라 자연스레 미소가 흘러나왔다. 어쩜 저렇게 티가 날까, 바보 같은 사람. 서로 제대로 말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드물었다. 표정이나 행동에서 묻어났기 때문에 표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 집에 있는 시간이 줄어든 치토는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끝없이 스케쥴을 조정했다. 결국 마계의 사람인 치토는 인간계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한이 필요했다. 최근에는 그 문제로 마계에 가는 일이 많았다. 치토는 테이블에 옆으로 누워 그 앞에 앉아 있던 겐타로와 눈을 맞추었다. 치토의 눈빛은 평소보다 좀 더 어두웠다.

 

치토가 처음 유메노 겐타로를 만난 것은 천 년 전이었다.

유메노 겐타로라고 하기엔 아주 먼 존재였지만, 그의 전생이었다. 한 가옥 안에 갇혀 있는 그를 처음 본 치토는, 그래, 한눈에 반했다고 하는 게 좋겠지. 한 나라의 왕족이었던 그는 자유로운 생활을 하지 못 하고 부모의 말 하나하나에 따라야만 했던, 그런 폐쇄적인 생활에 갇혀 있는 자였다. 그리고 치토는 그에게 자신이 언젠가 이 나라로 내려와 그를 해방시켜,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어렸던─이천 살이 넘은 시점이었으나, 마계 기준의 나이일 뿐 인간계 나이로 계산하자면 고작 열댓 살 될 수준이었다─ 그녀는 결국 다신 일본에 갈 수 없었고, 전생의 그는 스무 살 채도 되지 않아 사망했다. 그 후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는 어여쁜 외모로 다른 나라의 왕자에게 성별을 속이고 시집을 가게 되었으나 (이 또한 분명 그의 부모의 의사였겠지.) 금방 그가 남성인 것이 발각되고 분노한 왕자에 의해 사형 당했다고 했다. 결국 치토는 약속조차 지키지 못 하고 그를 떠나 보내야만 했다. 다음 생의 유메노 겐타로를 만나기 위해, 천 년이라는 시간을 그를 위해 보냈다. 시도때도 없이 인간계로 내려가 그의 환생을 찾아다녔고, 21세기나 되어서야 그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겐타로가 이 저택을 발견한 것은 지극히 우연이었다. 단순히 이 동네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던 치토는 자신이 지키고 있는 이 저택을 동네 근처 산 속으로 이동해 그를 데려올 타이밍을 재고 있었고, 우연히도 그가 이곳으로 찾아와 문을 열어 준 것──이라고 치토가 스스로 이야기했다.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점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치토는 이 저택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구실로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마계와 인간계를 오고갈 수 있었고, 절대로 이 저택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저택과 함께 이동했다. 그것과 더불어 유메노 겐타로와 단둘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전생의 그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 한 죄를, 환생의 그를 만나 기필코 치르고 싶었다. 인간계에 머무르고,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두 가지의 욕심이 불러 온 결과는 그와 함께 하루도 빠짐 없이 이 저택을 지켜 나가는 것이었고, 이것이 옳은 판단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미 겉으로는 낡을 대로 낡은 그 저택은 모두 치토의 마력으로 유지되어 있었다. 이미 전생의 약속이라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치토는 그저 유메노 겐타로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었다. 가볍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자신이 그에게 하고 있는 행동 또한 전생의 그의 자유를 내다 버린 그의 부모님과 똑같다는 것이었다. 치토는 그런 사실을 알고도 회피하고 있었다. 부디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겐타로가 이해해 주길 바랐다. 

 

“그걸, 이제야 말해 주는 당신도 바보 같네요.”

“믿, … 믿어 주는 거야?”

“글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어요. 저에게 집착한다는 것즈음은.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인 저를 이런 곳에 가둬 놓고,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제 앞에서는 한껏 밝은 척하며 제가 떠나지 않게끔 하고. … 하지만 나는 당신이 아는 천 년 전의 그 사람이 아니에요.”

“알고 있어. … 그건 더 이상 됐어. 지금 내가 좋아하는 건 천 년 전의 당신이 아니라, 지금의 당신인 걸 깨달았으니까. 그거면 된 거예요.”

 

겐타로는 치토의 말에 알 수 없는 사람. 이라며 작게 내뱉었다. 치맛자락을 약하게 붙잡았으나 두 팔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치토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를 안정시켜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치토는 팔을 뻗어 그의 뺨에 자신의 한 손을 얹었다. 차가운 손의 감촉에 겐타로는 어깨를 흠칫거렸다. 몇 달 전만 해도 적당한 온기를 가지고 있었던 치토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겐타로는 눈을 크게 뜨며 두 손을 황급하게 치토의 손 위에 얹었다.

 

“있지, 나, 이거 말고도 전해 줄 말이 있는데, 들어 줄 수 있어?”

“… 불안하게 하지 마요, 치토.”

“메이드라면 주인의 말은 들어 줘야죠. … 물론,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면 그래도 괜찮아. 억지 따위 부리지 않아도 돼요, 그건 당신의 의지니까.”

 

치토는 팔을 내리고 힘 없이 쓰게 웃었다. 겐타로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자 뺨 또한 손과 마찬가지로 매우 차가웠다. 이 저택에 들어와서 11년 간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 했던 한기가 갑작스레 몰려 왔다. 겐타로는 침을 한 번 삼켰다. 잔뜩 긴장해 있는 겐타로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자 치토는 살짝 고개를 숙여 흔들리는 동공을 멈추려,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내일부터 몇 주, 아니, 몇 달이 될 수도 있어. … 많이 늦으면 몇 년이 될 수도 있고.”

 

치토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았다. 그만큼 전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라는 것을 겐타로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치토의 말에 한껏 귀기울이고 있었고, 그 말을 들은 겐타로는 올 것이 왔다는 듯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치토의 종으로서 해 주지 못 한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11년 동안 함께해 온 것치곤 둘만의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고,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 치토의 볼에 얹어져 있던 자신의 팔을 내려 이번엔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미약하게 몸을 떨었다. 치토는 결코 그의 모습을 보고 ‘유메노 겐타로답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앞이기 때문에, 그런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아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저택을 지켜 줘야 해. … 11년이나 돼서, 메이드에게 처음 하는 부탁이 이런 거라서 미안한걸.”

“…… 와 줄 건가요? 정말로. 일이 끝난다면… 돌아오실 건가요?”

“말했잖아요. 나는… 너를 만나서, 너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이 인간계로 온 거야. …… 11년 동안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도 못 했고, 이곳에 가둬 놓았으면서 이런 말하기도 뭐하지만요.”

 

당신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겐타로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지금 치토는, 겐타로를 향해 ‘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말 하나하나에 진심이 담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소의 귀여운 하이톤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진중한 목소리만이 저택에 울려 퍼졌다. 치토의 목소리 또한 제법 떨리고 있었다. 서로의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 줘서. 치토 또한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그의 생각을 읽는 것을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을 읽음과 동시에 치토의 마음 속에서 죄가 더더욱 커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몇 분간의 정적이 흘렀다.

 

“천 년 동안 이 저택을 지켜 왔어요. … 하지만 마법사도, 무적인 건 아니에요. 모아 둔 마력을 전부 다 쓰면 죽기 마련이거든. 그리고, 나는 그 힘을 전부 이 저택에 쏟아 부었어. 그러니까, 나는… 일 때문에 가는 게 아니에요. 일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너랑 함께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 없는 거야.”

 

그렇다, 마법사라고 해서 당연히 아무런 문제 없이 오랜 기간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저택을 구실로 하여 인간계와 마계를 오고 간 치토는 천 년 동안 이곳에 머무는 시간 때문에 도무지 마력을 충전할 시기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 몸 상태가 영 좋지 못 해 검사를 받으러 가니, 자신의 몸의 9할의 마력을 전부 잃은 상태였다. 몇 달─늦으면 몇 년 동안의 충전을 하지 않는다면 몸이 버티지 못 하고 사망할 것이라는 검사 완료 내역을 받았다. 최근 몇 년 치토가 마계에 다녀오는 시간이 길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루 사용할 마력을 그때그때 충전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으로도 역부족이라는 것을 치토는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결국 결정한 사항은 바로 저택을 그에게 맡기고, 오랜 기간 동안 잠에 들어 마력을 충전하는 것이었다. 이를 전하는 것도 거의 몇 주가 걸렸다. 이 광활한 저택을 그 혼자 지키게 하는 것은 굉장히 무책임한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를 지키기는커녕 자신이 먼저 죽고 만다는 사실이 더욱 비참했다.

 

“중간에 지쳐서 떠나도 괜찮아, 네 인생을 찾으러 가도 괜찮아. 나를 잊고 다른 인생을 사는 게, 사실은 오히려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어요. 11년 동안 너를 가둬 놓은 죄를, 적어도 나를 버리고 가는 것으로나마 벌을 받게 해 줘도 상관 없어요.”

“… 한 번 종이 된 몸은, 주인이 강제로 벗어나게 해 주지 않는 한 영원한 종이에요.”

“그럴 순 없어. …… 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은 할 수 없어요.”

 

치토는 흐느꼈다. 겐타로는 그녀의 옆머리를 뒤로 넘겨 차가운 볼 위로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맞추었다. 눈물 자국이 생길 틈도 없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치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겐타로와 시선을 맞추다 또 한 번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한 번 주인이 된 몸은, 절대로 종을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말 없이 떠나 보내지 않아요.”

“… 기뻐요, 치토가 그렇게 말해 주어서.”

 

치토의 몸이 발에서부터 점차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그 사실에 눈치챈 겐타로는 급하게 치토를 껴안고선자신의 입술과 치토의 입술을 포개었다. 치토는 울고 있었다. 서로의 인생에 필요한 유일한 것이 바로 서로였기 때문에 더욱이 간절했다. 11년만에 처음으로 나누었던 키스는, 너무나도 잔혹했다.

 

“… 종과 주인의 관계를 떠나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마계로 떠나기 전, 치토가 한 마지막 한마디였다.

 

 

 

 

 

 

치토가 잠에 들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그 뒤로부터 이틀 뒤였다. 저택은 점차 먼지가 쓸고, 한기가 돌기 시작했으며 겐타로는 그제서야 메이드답게 이곳저곳의 방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가 보지 못 한 방은 물론이며, 치토의 방 또한 곳곳이 둘러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치토의 방에는 11년 동안 꾸준히 써 온 다이어리─가벼운 일기 형식이었으나, 내용이라곤 겐타로에 관한 것이 전부였다. 허나 3일 동안 꾸준히 읽어 온 바로는 삼사 년 정도는 마력 얘기가 대부분을 차지했다─와, 겐타로의 성장을 그려 낸 여러 그림이 쌓여 있었다. 치토는 단 한 번도 겐타로에게 그림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아마 처음 글을 쓰는 취미가 생긴 자신과 똑같은 기분이었겠지. 이런 점을 보면 아직 치토는 어린 아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부끄럼 탓에 이런 자랑스러운 것을 보여 주지 않았다니, 겐타로는 그렇게 몇 시간이고 치토의 흔적을 감상했다. 아마도 이 저택에 와서, 가장 시간이 빠르게 가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세 달즈음 지났을까. 저택은 어느 정도 관리할 수 있었지만, 치토가 없다는 사실이 확실하면 확실해질수록, 더불어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만 커져갈수록 겐타로는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괴로워서 참을 수 없었다. 언제 한 번은 청소를 하던 도중 가슴이 저릿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끝없이 눈물을 터트리다가 결국에는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시간이 갈수록 혼자 이곳을 관리해 나가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저택은 더 이상 그 어떤 마력의 영향도 남아있지 않았고, 청년은 홀로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허나 이곳을 나가리라는 생각은 단 1초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무래도 치토가 돌아올 것이라는 그 믿음 하나가 존재하기 때문 아니었을까. 처음 몇 달간은 저택 곳곳에 남아 있는 치토의 흔적 덕분인지 이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자가 자기 자신뿐이라고 생각하지 못 했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곁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청소마저 게을리 하며 치토의 침대에서 그녀의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등, 아마 그때부터 겐타로의 망상증이 심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한 번도 외로워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녀의 형상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망상을 하는 와중에도 현실의 그녀가 마계에 가 있다는 점은 잊고 있지 않았다. 망상증에도 현실과의 구분은 확실했고, 망상의 세계에 빠지지도 않았다. 확실히 말하자면, 망상의 세계에 빠지고 싶은 마음 또한 없잖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현실의 치토를 잊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생겼다. 떠나기 전 만반의 준비를 전부 해 놓은 치토 덕분에 무엇이든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식량은 충분했으며, 인간계와는 동떨어진 공간이라 그런지 세금의 문제 또한 없었다. 그야말로 자유였다.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 따위 없고, 찾아 올 사람조차도 없었다. 자신이 이 저택의 주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루는 치토의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을 때였다.

 

치토가 떠난 뒤 일 년이 되는 해였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마음의 공허함이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 세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불과 베개, 갈아치운 매트리스… 치토의 향을 잃어 일부러 그녀가 사용하던 향수까지 뿌려 보았으나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구멍이 마치 상처마냥 고통을 불러 왔다. 그때를 기준으로 갑작스레 생활은 달라져 갔다.

그리워하는 마음은 커져 갔으며, 이를 달래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그때 처음으로 이곳을 벗어날까 생각했었던 것 같다.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지만 그저 향수 특유의 짙은 향만이 남아 있을 뿐 그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치토가 보지 않고 있다고 해서 다른 옷을 입은 적도 없었고, 청소나 세탁 등을 하루라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그에게도 어려운 시기가 찾아 왔다고 할 수 있었다. 스물 후반이 되어 가는 이 나이에, 아직까지 신뢰하고, 함께할 수 있는 자가 그녀뿐이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아니,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자.

치토가 떠나고 1년, 겐타로는 스물다섯이 되었다. 십이 년을 이곳에 갇힌 채 오로지 치토만을 바라보며 살아 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겐 그녀뿐이라는 것을 뜻했고, 지금 와서 갈 곳이라고는 없었다. 굳이 이곳에서 벗어나 다른 장소에서 적응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조차도 없었다.

“…… 내게 선택지는 이것뿐이에요, 치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겐타로는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가볍게 정리했다. 치토의 방에서 나와 복도를 통해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기나긴 복도를 지나치는 와중에도 제법 많은 생각이 오고갔다. 어쩜 이렇게 나를, 자신만 바라보게 만들 수 있을까. 과연 이것이 치토의 겐타로를 향한 집착인지, 혹은 그저 운명이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인지 결정할 이유도 없었다. 결국에는 이것이 자신의 인생이었고, 유일한 길이라는 것만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기뻐, 그렇게 생각해 줘서. … 내가 바랐던 대로야.”

거실에 도착하자 테이블에 올라와 있던 다 식은 차로 목을 축이며 태연하게 앉아 있는 소녀가 있었다. 생기 있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겐타로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으나, 최대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어서 오세요, 주인님.”

“그런 식상한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면 안 돼?”

“바라시는 대로.”

겐타로는 허리를 굽혔다. 치토 또한 얼굴을 가까이 하며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앞으로는 평생 함께야, 나의 메이드.

각오는 되어 있답니다, 나의 주인님.

46_i.png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