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우리는 시작부터 어딘가 비틀려 있었다. 서로가 족쇄가 되어 멀리 떨어지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곁을 내주지도 못하는 기이한 관계……. 나는 너를 무엇으로도 정의하지 못한다.
***
Rain falling Backwards
***
2월은 언제나 아픈 달이였다. 어렸을 때는 몸이 약해서, 한참 1월의 한파가 지나고 따뜻해질 때 즈음 감기에 걸리곤 했다. 2월은 겨울의 끝이고, 동시에 봄의 시작인 달이라 보통은 얼음이 녹아내리는 달이지만 내게는 항상 억지로 온 봄이였다. 얼음이 부서지면서 머리도 같이 깨지는 것만 같았다. 낮에는 죽은 듯이 누워서 겨울의 눈뭉치보다도 차가운 사용인들의 손이 열을 재는 모습을 손 하나 꼼짝 못하고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겨우 열이 떨어져 앉아있을 수 있게 되면 시간은 달이 내려온 밤이였다. 새벽에는 낮보다도 심하게 열이 올라 제정신을 차리고 있기 어려웠음으로, 늘 내가 직접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사용인들도 들어오지 않는, 달이 어렴풋하게 비출 때쯤의 어중간한 시간이였다. 내 방에는 시계가 없어 시간을 확신할 수 없었기에 늘 어림짐작할 뿐이였지만, 어찌되었건 그 시간은 1시간도 채 안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시계가 없는 방에 가만히 누워만 있는 것은 꽤나 무서운 일이였다.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나는 날짜를 구분할 수 없었다. 오늘과 내일 역시 구분하기 어려웠고, 쓰러지거나 정신을 놓았다가 눈을 뜨면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2월의 시간은 내 작은 방에 가두어져서, 주변인들이 발빠르게 움직이는 동안 나는 가만히 멈추어 서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게 늘 두려웠고, 그렇기에 2월의 가운데에 존재하는 내 삶의 시작조차 사랑할 수 없었다. 아츠하 가와 비슷한 대열에 놓여있는 다른 가문들의 자제분들은 늘 성대한 생일파티를 열어 잊혀지는 법이 없다지만, 아츠하의 차기 후계자의 생일은 이제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의문이였다. 영원할 것만 같던 날들의 고된 열병을 이겨내고 보는 아침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톡, 손으로 창문을 두드리며 턱을 받치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오늘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몸이 나은지 얼마 되지 않아 창문을 열 수는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일본의 2월은 비가 자주 내린다지만, 집에서 나갈 수 있는 날은 한 손에 꼽아서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에 흠뻑 젖어보는 것이 소소한 소원이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떤 몰상식한 사용인이 이런 새벽부터 주인의 문을 두드린단 말인가. 조금 의아하게 이어질 용건을 기다렸으나, 사용인답지 않게 밖은 여전히 고요했다. 누가 문을 잘못 두드렸던가? 입을 열어 허락을 말했다.
“들어와. 무슨 일이라도 있어? 왜 용건을 말하지 않고.”
그제야 문이 열린다. 창가에서 떨어져 침대의 구석에 걸터앉은 채로 문소리에 눈을 돌리면, 곧 냉랭한 검은 눈과 마주한다. 분명 떨어졌을 열이 다시 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고 일순 내쉬던 숨이 멎는다. 속내를 읽어낼 수 없는, 너무 검어서 오히려 상대를 비추는 거울같은 먹색 눈이 온 몸을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겁에 질려 굳어있는 저 자신의 눈도 꼭 저렇게 검으리라. 땀에 젖어있던 몸이 아프게 식고, 결국 시린 눈을 감아버렸다. 애써 다잡은 목소리가 한참 뒤에야 흘러나온다.
“어, 어머니……. 이른 새벽부터…….”
“깊게 생각할 줄도 알아야지. 이런 새벽에 감히 너를 함부로 찾아올 사람이 또 누가 있겠니.”
말을 끝맺기도 전에 꼭 검은 눈처럼 딱딱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겨우 입을 열어보지만 볼품없는 떨림과 내보이지 못한 속내만 맴돌 뿐이다. 하지만 어머니, 아무도 저를 올려다보지 않아요. 모두가 저를 내려다봐요. 그 누구도 제 허락을 구하지 않아요. 시선은 언제나 당신을 향하지요. 정말 모르시나요? 정말 모르나요? 제가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하였는지……. 웅웅거리는 이명이 귀를 차지하고, 잘 다듬어진 손톱이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앉은 자리가 창 근처였는지, 거새진 빗방울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툭, 툭, 툭…….
***
라무다는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저택의 하나뿐인 소중한 후계자 아가씨께서는 뭐가 그리 두려운지 덜덜 떨면서도 겨우 웃음짓고 있었는데, 아마 주변을 파악할 정도의 정신은 없었던 모양이였다. 앞으로 모시게 될 아가씨의 첫인상은, 솔직히 우스웠다. 절대 뒤가 깨끗하지만은 않은 대가문의 유일무이한 후계자가 저렇게 나약해서는 곧 방계한테 먹히겠구나 싶었다. 게다가 저 억지웃음은 무언가, 억지로 그려보아야 더 얕잡힐 뿐이였다. 얼마 전까지 크게 앓았다던데 몸이나 정신이나 아츠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라무다는 어둠 뒤에 숨어 가만히 지켜보았다. 예의 ‘어머니’는 고아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요즘 정세가 좋지만은 않구나. 이유는 알고 있으리라 믿어, 우리 후계자님.”
“……예, 어머니. 죄송합니다.”
“사과, 하지 말고. 눈 감지 말고, 떨지도 말고, 어쭙잖게 웃는 것도…… 이렇게 미숙해서야 어디에 쓰기에도 창피할 뿐이잖니. 자회사들의 상장은 지난 분기로 마무리해두었고, 해외 진출도 순조로워. 하지만…… 투자자들의 태도가 불안정하구나. 너는, 잘 할 수 있지?”
“…….”
“네 멍청한 오라버니가 그렇게 떠나고 벌써 몇 년이니, 그 이후로 이맘때는 항상 아프구나. 잊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 곧 사라질 것인데도 마치 세상의 보물인 양 굴고 있으니……. 그리 상냥하여서 어찌 아츠하의 일원이 되겠니. 좋아하는 것에 대한 미련을 접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단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휘둘리고 있군. 라무다는 영 불편한 기색으로 대화를 엿듣다가, 문득 하츠사의 목소리가 흐려질 때에 어둠에서 나왔다. 그제야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하츠사가 경계어린 눈빛을 하고 그를 바라본다. ……아니, 안심한 듯한 얼굴로 바뀌었다. 경계는 아마도 어머니를 향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라무다는 묘한 기분을 받으면서 유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 전의 하츠사와는 달리 자연스럽게 기쁜 듯한 얼굴이 그려졌다. 아직 비가 내렸다. 어머니는 곁의 라무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매몰찬 언어를 이어 나열했다. 하츠사의 흐린 언어를 집어삼킨 채였다.
“‘이 방에, 이 저택에, 이 세상에…… 제 것은 고작해야 제 마음밖에 없어요. 온전히 제 것이라고 부를 것이 그것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어머니, 이런 마음을 부정하시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게 제가 가진 유일한 것인데, 그럼 어찌해야 하나요.’ ……라고 하겠지. 뻔하구나. 지킬 것이 없는 사람은 한없이 나약해진다고 했던가, 오히려 묻고 싶구나. 어째서 네가 가진 것이 없다고 여기지? 아츠하의 유일한 후계자님.”
“그건…… 온전한 제 것이 아니에요. 어머니의 것들이잖아요…….”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면서 욕심도 많구나.”
하츠사는 실제로 어머니와 눈을 마주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탓에는 겁에 질린 하츠사보다 늘 미묘하게 사람을 빗겨 보는 어머니의 탓 역시 있다는 생각에 하츠사는 조금 억울한 기분과 동시에 우습게도 기이한 자신감을 얻어 떨리는 손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라무다는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 아직 정식 계약은 하지 않았지만 곧 아츠하에 속하게 될 텐데 벌써부터 밉보이는 것은 곤란했다. 그에게는 아츠하여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하츠사를 맹렬히 훑었다. 특이하게도 아래로 내려갈수록 하얗게 변하는 그보다는 조금 연한 분홍빛 머리카락, 자신의 어머니를 두려워하는 것을 빤히 담았는데도 역설적으로 속내를 읽기 어려운 거울같은 검은 눈, 평균적인 정도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자신보다는 마른 팔과 작은 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고, 날이 밝아감에 따라 비줄기는 점점 거새졌다. 시간은 지나는데 날은 여전히 어두운 것이 그 증거였고, 방 안에는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끊임없이 가라앉는 심해를 떠올리게 만드는 물에 젖은 분위기는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라무다는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관심을 끌어모아 특유의 애교와 헤사한 미소를 짓는 대신에, 두꺼운 유화 물감으로 덧칠한 것 같은 어쩐지 인공적인 느낌의 하늘 파란 눈으로 도장을 찍듯 눈을 옮겼다. 새 것처럼 보이는 라텍스 침대, 옆에는 작은 탁상 책상이 있지만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바닥과 천장은 하얀색으로 먼지 한 톨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침대의 아래편이나 창틀에는 분명 잿빛 먼지가 쌓여 있을 것이다. 연한 아이보리 색으로 실한 것으로 보이는 창틀은 얼마 전까지 아가씨께서 앓았던 탓인지 자물쇠까지 걸어서 잠겨 있었고, 그 밖에는 탁한 아침의 풍경과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보인다. 그 외의 가구로는 책꽃이나 책상 등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에 두고 있는 가구들이 완벽하게 배치되어 있고, 대체로 하얀색을 테마로 한 방인지 하얀색 바탕에 포인트 색을 주는 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필수까지는 아니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모든 방에 하나씩 걸어 두거나 놓여 있거나 혹은 팔에 채워져 있기라도 해야 할 시계만은 보이지 않았다. 라무다는 하나하나 꼼꼼히 새로운 아가씨의 방을 살펴보고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이곳은 저 아가씨만을 위한 감옥이나 정신병원이라고. 라무다는 다시 하츠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츠사는 듣지 못할, 속마음이 키득거렸다. 나는,
네가, 필요해. 너는 어때?
***
“아가씨, 라무다입니다~”
하츠사는 옷장 앞에 서 있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연말 파티가 열릴 것이다. 어머니는 최근 연말 파티가 중요하단다, 명심해. 라며 당부하시곤 했었다. 하필 오늘은 폭우가 쏟아졌지만, 일정이 취소되는 일은 없었다. 왠일로 존댓말은, 손을 옆으로 내밀자 목에 차가운 것이 닿는다. 목걸이였다.
“그냥~ 기분내기? 왠지 오늘 처음 만났던 날이랑 날씨도 비슷하구~ 그치? 그치?”
“……응, 그렇네. 그보다 내가 할 수 있었는데……. 고마워.”
“아가씨는 항상 그러네~ 내가 왜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가씨의 사용인이잖아.”
키득키득, 라무다는 웃음을 숨길 생각조차 않는다. 처음 만난 날로부터 벌써 3년이 지났다. 짧다면 짧을 시간이지만, 하츠사는 저택의 누구보다도 라무다가 좋았다. 하츠사는 천천히 눈을 감고, 머리카락을 묶어주는 라무다의 손길을 느끼며 과거를 회상한다. 그 날 이후로 하츠사는 다른 사용인의 시중을 받지 않았다. 하츠사도 원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보다 결정하는 것은 어머니였다. 하츠사는 그때 새삼스럽게도 자신의 것이 될 저택의, 자신의 방에 단 하나도 자신의 것이 없음을 실감했다. 어머니는 조롱하듯 말하였지만, 정말 하츠사의 것은 그 자신 뿐이다. 하츠사는 단 한번도, 그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네가 정말 그리 생각한다면, 만들어 보려무나. 네 것, 마음이 아닌 너의 것. 앞으로 네 시중을 들을 사용인은 하나 뿐이다. 오늘 막 도착한 아이니 믿을 수 있겠지……. 길들어 보렴, 너의 것으로.’
아직도 생생한 언어를 되짚은 하츠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길들어 보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기는 하는가? 하츠사는 절대, 그를 길들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아껴줄 뿐이다. 하츠사는 천천히 눈을 떠 거울을 보았다. 구불거리는 긴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묶여 올려져 있었다. 목걸이는 거부의 투자자가 직접 공수해왔다는 장인의 것이다. 눈가의 연한 화장은 우아한 분위기를 주었으며, 귀에는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목걸이와 대비되는 심플한 피어싱이 걸려 있다. 그리고…… 검은 눈동자는 먹물을 풀어 놓은 것 같았다. 검지만 동시에 투명한 모순적인 두 눈에 라무다가 비춰졌다. 헤사하게 웃는 얼굴, 너무나도 무해한 사람으로 보인다. 거짓말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거친 말조차 들어본 적 없는 고귀한 신분의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츠사는 알고 있었다. 라무다는 나를 보지 않아. 하츠사는 굳어 있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려 웃음지었다. 방에는 여전히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하츠사는 고개를 돌려 라무다에게 물었다.
“몇 시야? 아니다, 얼마나 남았어?”
“흐~음, 곧 내려가야 해!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
“응…….”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나를 보지 않아. 파란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아. 아마도 다정한 말은 전부 거짓, 상냥한 행동도 전부 거짓, 믿을 수 없어……. 하츠사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정을 주지 않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하츠사는 속절없이 그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었고, 그 마음에 거짓이라고는 없었다. 그는 절대 나를 돕지 않을 거야……. 전부 보았음에도 줄곧 방관하고 있는 모습을 봐. 너를 도울 사람은 없어. 오래전에 포기한 희망은 계속해서 속삭였다. 곧,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파티가 끝나면 또 작은 감옥에 갇혀있겠지. 하츠사는 조소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아가씨.”
그리고, 그 위에 차가운 손이 겹쳐졌다. 파란 눈과 검은 눈이 마주쳤다. 라무다가 하츠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특유의 무해한 미소를 걸친 얼굴이였다. 하츠사가 왜, 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이였다. 라무다가 여상하게 말했다. 하츠사는 이해하지 못했다. 눈은 여전히 마주하고 있었다.
“……잠깐, 다시 말해 줘.”
“우리, 도망칠까.”
하츠사는 눈을 깜빡였다. 아직 꿈일지도 몰랐다. 악몽이 아닌 꿈은 꾼 적도 없지먼, 그래서 착각하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너무 달콤한 꿈이라서 아직 깨어나지도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라무다가 웃는 얼굴이 진심이라고 느껴질 리 없었다. 평소의 농담인가? 오늘이 만우절이던가? 눈을 굴려 주변을 돌아봤지만, 없던 것이 생길 리가 없기에 안타갑게도 달력을 찾을 수는 없었다. 라무다의 팔에 둘러진 시계의 초침소리와 엇박의 심장소리가 맞물렸다. 그게 또 꼭 엉망인 콰르텟처럼 들렸다. 하츠사는 더 이상 울지 않는데도,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디든 좋아. 아가씨가 가고 싶은 곳도 전부 가보고, 하고 싶은 것도 전부 해보고. 더 이상 이렇게 갇혀있지 말고……. 오늘은 마침 파티라서, 어머니도 모르실거야. 그러니까,”
도망가자. 하츠사의 위에 포개어진 차가운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평소에는 너무 차가운 손이였는데,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츠사의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진 것만 같았다. 과부하가 걸린 머리는 정상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고, 전부터 되뇌이던 중얼거림만 반복되었다.
다정한 말은 전부 거짓, 상냥한 행동도 전부 거짓, 너를 도울 사람은 없어…….
“……정말?
끝내 버리지 못한 희망은 차가운 손을 잡았다. 하츠사의 작은 세상에게 그에게 가장 다정했던 사람의 손이였다.
***
”그래, 내일 나가겠다고……. 몸이 약하지는 않지만, 유독 감기를 심하게 앓는 편이니 주의하도록 하렴. 너무 오래 나가 있진 말고. 적당히…… 그 애가 자유를 충분하 누리고, 가장 행복하다고 느낄 때에 돌아오렴.“
”네에, 네에~ 아가씨가 당신을 닮지 않아 다행이지.“
”그러니? 장담하는데 우리 후계자님은 네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 전부 파악하고 있을 거야.“
어두운 방 안에서 두 목소리가 울렸다. 미성의 목소리는 누군가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작고 나긋했다.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낮은 목소리의 주인의 것이였다. 탁, 하고 찻잔을 내려놓은 사람은 톡, 톡, 하고 긴 손톱으로 찻잔을 두드렸다.
”그리고…… 네게 진심이기에 아닌 척 넘어갔을 테지. 너는 모르고 있는 듯 하여, 하나 충고하자면 그 애는 너를 사랑해. 유념하길 바라지.“
”그럴 리가. 아츠하에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는 해?“
”그래, 너는 모르겠지. 하지만 이건 알아둬. 네가 만약 내 말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건 필시 너도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된 거겠지…….“
***
톡, 톡, 톡…….
마치 빗방울 소리처럼, 링거액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라무다는 아직 눈을 뜨고 있지 않았다. 하츠사는 오늘만큼 아츠하를 찾았던 적이 없었다. 오늘만큼 그 저택이 그리울 수가 없었다. 하츠사는 두 손을 모아쥐고는, 눈을 뜨지 않는 분홍머리의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손을 모을 때면, 함께 잡아주던 차가운 손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항상 웃고 있는 입꼬리도 지금은 평평했다. 평소에는 그리도 피하고 싶던, 자신을 보지 않는 기묘한 파란 눈동자가 그리웠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신은 그녀가 바라는 것은 이루어주지 않았고, 라무다에게는 닿지 못했다.
도망치는 것에는 성공했다. 정말 파티가 바빠서였는지, 언제나 근처를 지키던 경호원들이 없었다. 그렇게 도망쳐서, 라무다가 말했던 것처럼 하고 싶은 것들, 가고 싶은 곳들은 전부 둘러봤다. 잠은 호텔을 빌리거나 텐트를 쳤다. 항상 편안하기만 했던 저택과는 달리 모든 것이 힘들고 어려웠으나, 겨우 손에 쥔 자유는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가진 것도 없었고, 오히려 생활은 고되었으나 아무도 감시하지 않고 꼭 해야 할 일도 없다는 자유 속에서 하츠사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5년을 보냈다. 그동안 집에서 가져온 돈만으로는 생활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일도 시작했다. 작은 극단의 알바 자리였고, 그렇게 꼬박꼬박 모은 돈으로 작은 단칸방도 샀다. 두 사람이 저렴하게 구매한 단칸방은 주변에서 가장 큰 곳이였는데도 저택의 하츠사의 방보다도 조금 작았고, 게다가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아 겨울에는 너무 추웠다. 물론 아무리 그런 집이라도 작은 극단의 알바만으로 살 수 있을 가벼운 금액은 아니었기에, 라무다 역시 꼬박꼬박 돈을 저축해 집을 나오고 2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서 집을 살 수 있었다. 라무다는 매일 일을 하러 나갔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는 비밀이라며 손을 흔들었었다. 당시에 의문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걸 물어보자니 추궁하는 기분이 들었다. 우린 아무것도 아닌데. 사귀는 것도, 하다못해 서로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라무다가 하츠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백했고, 하츠사는 라무다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더구나 하츠사는 라무다를 믿고 싶었다. 그 때부터, 하츠사는 라무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하츠사는 지금 묻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결국 같이 5년을 지내면서도 하츠사는 라무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8년을 함께 보내면서, 서로가 특별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는데도 결국 회상할 추억조차 없으며 정의내릴 수 있는 관계조차도 아니었다. 라무다는 밖에서도 여전히 하츠사를 아가씨라고 불렀고, 마치 하츠사가 자신이 주인이라도 되는 것마냥 시중을 들었다. 서로에게 주인, 그리고 사용인이라는 호칭을 달아줄 수는 있어도 그저 주종관계라고 부르기에는 둘의 태도가 묘했다.
”라무다.“
그렇게 아무것도 되지 못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이유는 결국 라무다였다. 도망친 것도, 결국 집안에 묶이게 된 것 역시도 같은 사람 때문이라니, 하츠사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울 것 같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느 날 갑자기 계획도 없이 도망쳤던 것처럼, 돌아올 때도 어느 날 갑자기 순식간에 일어났다. 구구절절 길게 설명할 것도 없는,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일. 라무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수술을 해야 하는 데 수술비가 부족했다. 두 사람의 세상에서 살고 있던 하츠사는 아츠하에 도움을 청했고, 현재 상황이였다. 5분도 걸리지 않을 짧은 설명으로 끝날, 허무한 사건이었다. 더 이상은 찾아오지 않을 행운이였고, 한여름 밤의 꿈이였다. 이제는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인형처럼 누워있는 라무다를 빤히 내려다보던 하츠사는 고개를 숙였다. 잠이 왔다.
***
눈을 뜨니 밤이였다. 비가 올 것처럼 구름이 잔뜩이라 달은 뜨지 않았고, 대신 병실의 은은한 조명이 눈을 따갑게 했다. 한 자세로 오래 잠들어 있었더니 팔이 아팠다. 손목을 꾹 누르며 습관적으로 라무다가 누워있을, 그러니까 정확히는 눈을 감은 라무다가 누워 있었을 자리에 라무다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언제 깨어났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봤지만, 발견한 것은 라무다의 팔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던 링거줄들이 엉망으로 빠져있고,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한 듯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법하게 열려있는 문이였다. 나를 깨우지 않도록 살금살금 나간 모양이였다. 그래도 깨웠으면 좋았을 텐데. 몸도 아직 움직이기 힘들 텐데 또 어딜 갔지……. 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의식은 몽롱했고, 느린 발걸음으로 창문가로 향했다. 달이 없어서 밖은 굉장히 어두웠지만, 그만큼 소리는 잘 들렸다. 차 소리, 개 짖는 소리, 발걸음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목소리.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가 창문 너머로 울렸기에, 반쯤 열려있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새 목소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검은 어둠과 섞여 탁하게 보이는 분홍머리가 보였다. 눈에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다친 사람을 보고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좋아하는 것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끔찍했다. 더구나 나를 지키다가 다친 사람이였다……. 라무다는 아직 조금 절뚝거리는 것 같았다. 눈이 흐려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허리를 더 숙여서 막 입을 열었다.
”라무다!“
순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라무다를 처음 만났던 날도, 처음 집에서 도망쳤던 날도, 그리고 라무다의 사고가 났던 날에도 비가 왔었다. 그래서인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흠뻑 맞고 싶다는 소원은 진작에 이루어졌고, 이제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서, 눈을 감아버렸던 것 같기도 하다. 웃으면서 라무다에게 손을 흔들어 볼 생각이였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두 발이 바닥에서 완전히 떨어진 뒤였다. 온 몸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가 아팠고, 막 내리기 시작한 비가 흘러내렸다.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놀란 얼굴의 라무다가, 무언가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시야가 완전히 뒤집히고, 비가 거꾸로 내렸다. 비가 오던 순간들은 전부 거꾸로 돌아가고, 처음부터 시작하라는 것처럼. 하늘에서는 비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