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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였다. 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서재에는 약간의 적막과 책을 넘기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고요한 저택의 테르미도르는 장마로 시작해 장마로 끝날 셈인지, 어제 새벽부터 오늘까지 비만 잔뜩 쏟아내고 있었다. 안경을 고쳐 끼며 서류에 집중하던 루비는, 가넷이 서고 사이에서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가넷을 제 책상으로 불렀다. 방금전까지 책장 사이에 끼여서 책을 읽기라도 한 듯, 가넷의 손에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들려 있었다.

 "가넷, 잠깐 이리로."

 제 도련님이라는 작자가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서 약간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했다. 그러나 루비의 눈빛이 평소와는 달랐기 때문에 무언가 있구나, 하고 직감했다. 그의 석류를 닮은, 붉은색의 치켜 올라간 눈동자가 그날따라 알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던 탓이기도 했다.

 "도련님, 무슨 일이신가요."

 "별 일은 아니고,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매사에 저보다 잘난 귀족 자제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물어볼 때는, 항상 여자에 관련된 것이었다. 가넷은 뭔지 알겠다는 듯이 살짝 미소를 짓다가 루비에게 되물었다.

 "사파이어 아가씨에 관한 일인가요?"

 "응, 알고 있었네." 

"도련님이 저한테 무언가를 물어보실 때는 항상 사파이어 아가씨와 관련된 일이었죠."

 저리도 좋아한다는 티를 내고 싶어했을까, 라고 가넷은 생각했다. 루비와 사파이어가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왔으며, 연인으로 지내온 시간 또한 많다는 것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던 그녀이기에, 루비는 항상 사파이어에 관련된 일을 가넷과 함께 의논하곤 했다. 분명 이번에도 별 거 아닌 일이리라 여기며 가넷은 루비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기 시작했다.

 "정말 별 거 아니야."

"예, 들어드릴게요. 그래서 하실 말이라는 건 뭔가요?" 

"다음 주에 열리는 무도회 있잖아. 거기 사파이어도 갈까?"

 사파이어는 루비가 하는 말이라면, 대부분 거절하지 못했다. 물론 루비가 원하는 것이 사파이어가 원하는 것일 때가 더 많았지만, 약혼식을 막 끝낸 둘의 사이라면 춤 추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사파이어라도 루비와 함께 가고 싶어할 터였다.

 "도련님이 같이 가자고 제안하신 걸로 아는데요. 아마 가고 싶어하시지 않을까요?" 

"역시 그렇겠지?" 

"정 궁금하시다면 물어봐 드릴 수는 있어요. 다녀올까요?"

 "됐어. 지금쯤은 검술 연습하느라 집에 없을 거야. 이따 티타임 때 한 번 더 물어볼게."

 어떤 옷이 어울리려나, 라고 중얼거리는 루비를 뒤로 하고, 가넷은 서가 사이로 들어가 다시금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가씨에게 무도회에 입고 갈 옷을 만들어 드리려는 거겠지. 가넷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루비가 다시 가넷을 찾았다. 조금 다급한 목소리였다.

 "이번엔 무슨 일이신데요?"

 "가넷, 사파이어한테 무슨 색이 어울릴까?"

 "파란색 아닐까요. 눈동자도 이름을 꼭 닮으신 파란색이시고 하니까."

 가넷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새 사파이어에게 만들어 줄 옷의 도안을 그리고 있던 루비였다. 어제부터 줄곧 고민했었는지 서재의 책상만한 크기의 종이에는 이것저것이 난잡하게 적혀 있었다.

 "파란색이 역시 나으려나. 머리 장식으로는 티아라가 좋겠지?"

 "사실 사파이어 아가씨는 뭐든 잘 어울리니까 첨언할 여지는 없지만요." 

"그렇지? 뭘 입어도 잘 어울린다니까, 사파이어는."

 사파이어를 꼭 닮은 장식도 몇 개 만들어 달고.... 응, 나쁘지 않은 것 같네. 가넷은 또 다시 혼잣말을 하기 시작한 루비를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귀족 자제가 검술 말고 이런 일에 열중해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친구 관계여도 하인 주제에 간섭할 여지는 없다는 생각으로 무마했다.

 "무도회 날에 비만 오지 않으면 좋겠네요. 전에는 비가 와서, 도련님이 만들어주신 드레스 밑단이 다 젖었다고 얼마나 속상해 하셨는지." 

"그래도 입어 준 게 어디야. 난 그걸로 충분한데." 

"하기야 그렇네요."

 예술가가 만든 작품을 뮤즈가 걸친다면, 그걸로 예술가에겐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지. 자신을 예술가라 칭하는 루비도 그다웠지만, 제 뮤즈를 사파이어라 칭하는 루비에게 가넷은 웃음이 나왔다.

 "그 말을 본인 앞에서 해보시지 그래요." 

"사파이어가 낯간지러워하니까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분명, 사파이어에게 잘 어울릴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가넷? 루비가 장난스럽게 물어보았다. 가넷은 입을 여는 대신, 고개를 몇 번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실없는 얘기로 몇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저택의 창문을 그리도 시끄럽게 두드리던 빗방울은 금세 잦아든 지 오래였고. 서재 밖으로는 마차 한 대가 건너편의 저택에 도착했다. 가넷은 창문을 살짝 열고서 살짝 웃음을 띈 채 루비에게 말했다.

 "사파이어 아가씨가 오신 모양이에요. 슬슬 티 타임을 준비할까요?"

 "응. 그래줘."

 외투를 걸치고 저를 따라 서재에서 나오는 루비의 눈빛은 아까와 다르게 유해져 있었다. 사파이어 아가씨를 만날 생각에 저리 좋으신 거겠지. 가넷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복도에 불을 켰다. 비 내리는 테르미도르, 목신의 오후는 빗소리와 함께 프렐류드를 마치며 막 시작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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