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위를 이용한 압박, 유혈 묘사, 욕설이 섞여 있습니다. 불편하시다면 스루해 주세요.
여성이 지위를 가질 수 있다는 세계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많이 깁니다. 그리고 급전개 주의. 이후 이야기는 개인 포스타입에 따로 올립니다.
팔계는 차에 타 낯선 집으로 향했다. 집보다는 성에 가까웠지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옆에는 백발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무릎 위에 두꺼운 성경을 놓고 기도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삼종기도를 바치는지, 혹은 성모송을 바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줄곧 성모 마리아를 애타게 불렀다. 노인이 중얼거리는 걸 듣고 있을 때, 마부가 물었다.
“팔계 씨는 집사로 발령 난 게 처음이라고 했죠?”
“네.”
“모쪼록 잘 지내셨으면 좋겠네요. 집사장님, 영지에 다 왔습니다.”
“어어, 그래. 이제 들어가야지. 새 식구를 데리고.”
집사장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었다. 성이 있는 곳에 마차가 서자, 그는 손에는 소중하게 성경을 들고 마차 문을 열었다. 팔계 역시 따라 내렸다. 집사학교에 다니던 팔계는 졸업하자마자 바로 남작 성에 취직했다. 남작이 관리하는 곳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정원도 딱히 없이 영지 앞에 있는 가로수길 만으로 충분한 듯 문 앞까지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사격장이 있다는 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집사장이 말을 걸었다.
“팔계 집사, 이쪽으로.”
“아, 네.”
그들이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메이드 하나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집사장님 오셨어요?”
“응. 이번에 새로 들어 온 팔계 집사.”
“어머, 젊은 집사님이시네. 반가워요, 나는 메이드장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자작님은 어디 계신가?”
“백작님이 부르셔서 잠시 나가셨어요.”
“그러면 자작님이 오실 때까지 간단하게 설명해 주면 되겠군.”
팔계는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어떤 이인지 몰라도 꽤나 깔끔하면서도 황량하게까지 느껴지는 집 안이었지만 분주하게 집을 쓸고 닦는 이들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싶어진 팔계였다.
“간단히 설명을 하겠네.”
“네, 집사장님.”
“알다시피 여기는 자작님이 머무시는 집이야. 이쪽으로 오게.”
그는 팔계에게 집 구조를 설명해 주었다. 응접실로 사용하는 거실, 주방, 욕실은 평범한 구조여서 그러려니 했지만 팔계가 놀란 건 집 안에 서재가 세 곳이었다는 점이었다.
“자작님이 책을 좋아하셔서 서재가 많은 편이야.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책은 일단 모으는 분이시거든.”
“그렇군요.”
“아, 그렇지. 자작님을 뵙기 전에 주의사항을 일러 줘야지.”
“주의사항이오?”
“그래. 우선 자작님은 평소에 ‘아가씨’라고 부르는 걸 굉장히 싫어하시지. 아무래도 본인 지위가 있으니 그런 식으로 함부로 부르는 걸 못 견뎌 하시는 분이야.”
아가씨라. 시골에서 나고 자라 집사학교를 다니고야 겨우 도시로 온 팔계는 자작이 여성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은 눈치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집사장은 설명을 이었다.
“자작님은 종종 자네에게 휴가를 주실 텐데,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가 될 거야. 그 날은 의무로 쉬어야 하니까 성으로 출근할 필요는 없어.”
“네? 제가 여기서 사는 게 아닌가요?”
“여기는 모든 업무가 끝나면 집사며 메이드들은 죄다 옆에 있는 별채로 가서 생활해. 밤부터는 전적으로 자작님만 사용하시니까.”
“그렇군요.”
“자네는 어차피 수습 집사이니 많은 것을 시키지도 않으시겠지. 자작님이 휴일을 주면 감사히 푹 쉬면 그만이야. 어려운 일은 시키지 않으시겠지만 차 심부름은 시키실 테지. 중요한 부분이니 기억해 두게. 자작님은 커피를 드시지 않아. 코코아나 주스를 드시지. 커피는 입에 대지도 않으실 테니 억지로 권하지 말게. 그리고 코코아를 준비한다면 최대한 달게 준비해 드려. 만약 그러지 못할 것 같으면 갸또 쇼콜라 같은 초콜릿 디저트를 같이 준비하도록 하게. 주스는 웬만하면 드시지만 딸기주스는 피하는 게 좋아. 딸기는 생으로 먹는 걸 좋아하시니까. 가장 좋아하시는 건 오렌지주스니, 딸기주스를 안 드신다는 게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오렌지주스를 드리면 되고. 간혹 흰 우유를 드시고 싶다고 하시면 그렇게 하면 돼. 흰 우유와 달콤한 디저트를 함께 내 드리면 더 좋아하실 거야. 아, 디저트 중에 생크림이 들어간 것들은 느끼하다며 안 드시니 그것도 꼭 기억해 두고. 아이스크림도 딸기 아이스크림은 드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돼.”
제법 빠른 속도로 말하는 집사장이었지만, 팔계는 그가 한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 적었다. 적은 내용을 확인해 보니 제 주인 될 사람은 그렇게까지 까다로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주전부리 이야기도 따지고 보면, 초콜릿 디저트나 오렌지 주스를 주면 된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또 뭐가 있나, 하고 중얼거리는 집사장을 보며 팔계가 그를 보았다.
“아, 그렇지.”
“네?”
“자작님은 당신 방에 사람이 드나드는 걸 싫어하시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방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 다과도 다 서재에서 드시니까. 그렇지. 업무용 서재를 안내해야겠군.”
방은 철저하게 개인 공간이라는 건가. 팔계는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장은 업무용 서재로 그를 데리고 갔다. 벽은 전부 책장으로 덮여 있었고, 탁 트인 곳에 책상이 있었다. 만년필과 종이들, 그리고 빈 그릇과 컵이 있었다. 집사장이 그 모습에 혀를 찼다.
“미리 치우지 않고 뭘 하는 건지.”
“제가 치우면 되죠, 뭐.”
“놔둬요. 일부러 치우지 말아 달라 한 거니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집사장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팔계도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낮게 들려온 웃음소리가 여유로웠다.
“다녀오셨습니까, 자작님.”
“응. 고개 들어도 돼요.”
집사장은 고개를 들었고, 팔계도 조금 뒤에 따라 들었다. 푸른빛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을 가진 이가 서 있었다. 단발머리가 맵시 있게 잘려 있었고, 그 덕에 희고 긴 목이 도드라졌다. 그는 팔계를 보고 말했다.
“새로 들어온 집사라고 했나요?”
“네. 저팔계라고 합니다.”
자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책상에 놓인 종을 한 번 울리게 하고 아까와 같은 것을 가져다 줘. 라고 말했다. 그리고 팔계를 보더니 물었다.
“추천장은 있고? 교장이 썼나?”
“아, 여기.”
팔계가 추천장을 내밀자 자작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는 한 자 한 자 꼼꼼히 읽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흠. 백작님이 추천장을 써 줬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응? 그건 아니고, 그냥 신선해서요.”
신선하다니, 알 수 없는 말에 팔계는 고개를 기울이려다 이내 숙였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작은 추천장을 챙기고 말했다.
“백작님이 준 거라면 믿을 수 있겠네요.”
“다행입니다.”
“그러면 집사장한테 머물 곳 위치를 알려달라고 해요.”
“네, 알겠습니다.”
어린 메이드가 간식을 놓고 빈 그릇을 치웠다. 그걸 본 자작이 웃는 얼굴로 메이드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덕분에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겠네.”
“자작님이 항상 좋아해 주시니까 전 정말 좋은걸요.”
“상냥하기도 하지. 예뻐라.”
“이따 책 읽으실 때 들어가도 되나요?”
“그럼.”
“저는요. 자작님이 책 읽는 목소리가 너무너무 좋아요.”
“그러니?”
“네. 동화 속 요정 목소리 같은걸요. 그러면 이따 뵐게요!”
자작이 메이드에게 손짓하자, 메이드는 집사장과 팔계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살금살금 걷는 듯하다가 이내 탁탁 소리를 내며 주방으로 향하는 걸 본 자작이 집사장에게 눈짓했다. 그는 서재 문을 닫았다.
“집사장은 아침부터 고생했어요. 팔계 집사를 데리고 나가보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난 일 볼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집사장은 고개를 숙였고, 팔계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에 팔계도 고개를 숙였다, 둘은 서재를 거쳐 문 밖으로 나왔다. 팔계는 그제야 집에 붙어 있는 명패를 보았다. ‘염산옥’이라고 적혀 있는 그것은 자작이 이름이 산옥임을 알려주는 매개체였다.
“자작님이 자네를 맘에 들어 하신 모양이야. 한 번에 합격한 걸 보면.”
“보통은 바로 합격시켜 주시지 않나요?”
“꽤 오래 지켜보시지. 한 두어 달은 보고 결정하시니까. 하지만 자작님이 보는 눈은 뛰어나시니 난 자작님이 자네에게 뭔가를 봤다고 믿는다네.”
집사장은 성경을 제 옆구리에 끼고 손목에 차고 있던 묵주를 빼냈다. 그는 중얼중얼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한 그것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팔계는 생각에 잠겼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집사님!”
아까 산옥에게 다과를 가져다 준 메이드였다. 메이드는 풀꽃을 잔뜩 꺾어 팔계에게 내밀었다. 그가 저도 모르게 메이드 눈높이에 맞춰 몸을 굽혔다.
“왜 그래요?”
“이거, 묶어주세요! 꽃다발처럼!”
“자작님께 가져다 드리려고요?”
메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풀꽃은 줄기가 길게 뽑혀 있었다. 팔계는 풀꽃 줄기를 정성스레 엮기 시작했다. 메이드가 저를 보며 환히 웃고 있자니 차마 싫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정말 산옥을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 그는 저도 모르게 메이드에게 물었다.
“자작님을 많이 좋아하나 봐요.”
그 물음에 메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입을 열었다.
“자작님은 우리랑 똑같대요.”
“네?”
“아직 안 갔나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팔계가 돌아보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듯한 산옥이 서 있었다. 그에 메이드가 팔계가 든 꽃다발을 낚아채고 건넸다. 산옥이 기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팔계 집사님이 묶어줬어요!”
“그랬구나. 예쁘다. 꽃병에 꽂아야 되겠는걸? 어울리는 걸로 골라주지 않을래?”
“네, 자작님!”
“집사장.”
“네, 자작님!”
“팔계 집사를 별채로 데려가 줘요. 짐을 내려둬야지.”
“알겠습니다.”
집사장을 따라 팔계가 산옥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는 팔계를 보며 미소 짓다 말을 꺼냈다.
“고마워요.”
“네?”
“저 애를 도와줘서 고맙다는 뜻이에요. 이런 것들을 잘 못 하거든요.”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럼 가 봐요.”
산옥은 그렇게 말하고 메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당연하다는 듯 손을 잡은 메이드를 보고 팔계는 놀랐다. 보통 주인이 메이드 손을 잡고 저렇게 돌아다니던가. 아무리 어리다 해도 경우에 없는 일일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집사장이 그를 불렀다.
“가세. 별채로 데려다 주겠네.”
“네, 감사합니다.”
한편 산옥은 꽃다발을 꽃병에 꽂아둔 채 메이드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왕녀는 꽃을 보았습니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왕녀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왕녀는 하나하나 다정한 눈길로 모두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들어온 이는 메이드장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팔계 집사님이 짐정리를 하고 오셨나 봐요.”
“그러면 제대로 인사를 나눠야지.”
그는 책을 덮고 메이드에게 말했다.
“정혜야. 오늘은 여기까지만 읽을까?”
“내일 또 읽어주실 거예요?”
“약속.”
산옥은 정혜와 손가락을 얽어 약속을 하고 다시 메이드장을 돌아보았다.
“식사 준비해 줄래요? 새로 식구가 왔으니, 함께 환영해 줘야지.”
“네. 알겠습니다, 자작님.”
“우리는 다들 응접실로 오라고 이야기해줄까?”
“네, 좋아요!”
메이드장이 서재 문을 붙잡자, 그들은 손을 잡고 서재를 나왔다. 메이드장은 산옥과 정혜 앞으로 가, 팔계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내려갔다. 산옥과 정혜는 책을 읽고 있던 사용인들에게 갔다.
“오늘 새로 집사님이 한 분 들어왔으니, 환영하는 식사를 준비해 줘요. 다 같이 먹을 양이니 혹시나 내가 필요하면 말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정혜가 필요하면 도울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잊지 말고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산옥이 만족스레 웃으며 돌아서려는데, 팔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싱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은 환영하는 의미에서 식사를 다 같이 준비할 예정이니까.”
“저도 돕겠습니다.”
“사용인은 첫날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우리 집 규칙이에요. 필요하면 내가 나서면 돼.”
“그렇지만.”
“첫 날부터 주인 말을 안 듣는 못된 집사가 되려고요?”
산옥은 씩 웃으며 팔계를 집사장에게 데려갔다. 그는 팔계를 다른 이들 앞에 세우고 말했다.
“아까부터 봤던 마부부터 소개하지.”
팔계는 자작성에 있는 모든 이들을 소개받았다. 마부를 비롯해 메이드장, 다른 집사들과 메이드들, 마지막으로 정혜까지 소개를 마치자, 메이드 하나가 말했다.
“식사하세요!”
모두 식탁에 둘러앉았다. 가운데에는 산옥이 앉았고, 왼쪽에는 집사장이, 오른쪽에는 정혜가 앉았다. 서열 순으로 앉을 거라 생각했던 팔계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
“아, 집사장님은 우리 집에서 하는 모든 기도를 담당하시니까 왼쪽에 앉는 거고, 정혜는 당신도 눈치 챘겠지만 내가 예뻐하는 아이라.”
그렇게 말한 산옥은 팔계를 향해 웃었다. 그에 집사장이 제 옆 의자를 끌어 팔계에게 말했다.
“앉아요. 궁금한 게 많아서 물어보고 싶은데 거리가 멀면 물어보기 힘들잖아.”
팔계는 망설였지만 결국 자리에 앉았다. 산옥은 정말 흥미로운 걸 발견한 얼굴로 이것저것 물었다. 취미라든지, 특기라든지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나니 밤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산옥이 말했다.
“다들 자러 갈 시간이네요. 정혜도 들어가서 자야지?”
“네.”
“모두들 들어가서 자요. 아, 그리고 집사장과 메이드장은 잠시 나 좀 보고.”
“알겠습니다.”
“팔계 집사, 앞으로 잘 부탁해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정혜가 팔계를 붙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나가는 걸 본 산옥이 입가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서재에 들어가서 얘기할까?”
그들은 업무용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집사장이 문을 닫자, 산옥이 입을 열었다.
“어때 보여요?”
“현재까지는 그다지 눈에 띄는 행동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잘 보고 있어요.”
산옥은 그렇게 말하며 팔계에게 받은 추천장을 서랍 안에 넣었다.
“무슨 생각으로 추천장을 써 준 건지 몰라도 메이드장은 그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나한테 왔는지, 그 사람은 뭐 하다가 여기로 온 건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조사해서 나한테 보고하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집사장은.”
그렇게 운을 뗀 산옥은 집사장을 보고 고민하다 미소 지었다.
“뭐 물어보면 잘 대답해주고, 최대한 상냥하게 굴어줘요. 어쨌든 이곳에 있는 한 그 사람은 우리 식으로 대해 줄 필요는 있는 거니까.”
“그래도 될까요?”
“나도 집사장처럼 최대한 상냥하게 굴어볼 테니까. 우린 알잖아요. 서로가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정도는.”
산옥이 손을 잡으며 하는 말에 집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름진 손으로 손을 마주 잡았다. 일순 머릿속에 떠오른 잔상이 있었다. 어린 산옥이 바닥에 나동그라질 때, 제 품에 안고 함께 굴렀던 제 모습이 이상스레 선명했다. 산옥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 묻는 대신 말했다.
“주기도문 한 번 읊어봐요.”
집사장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정자세로 섰다. 그리고 하나하나 읊기 시작했다. 메이드장은 집사장이 읊는 모습을 보며 조금은 측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 외우네.”
“감사합니다.”
“이번에 부탁한 것도 잊지 말아요. 저팔계 씨에게 어떻게 하라고 했죠?”
“최대한 할 수 있는 대로 상냥하게.”
집사장이 그렇게 말하자 산옥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둘을 보냈다. 그는 그들이 나간 걸 확인하고야 서재를 벗어났다.
팔계는 숙소에 들어서자 바로 편지를 작성했다. 두어 장 남짓 되는 편지를 쓰는 듯하더니 쪽지 하나를 따로 썼다. ‘특이사항 없음.’이라고 적은 그는 옷을 갈아입었다.
다음날, 팔계는 출근하자마자 전날에 알아채지 못한 점을 발견했다. 자작성에 있는 모든 이들은 남녀에 상관없이 편하게 바지를 입고 있었고, 오히려 치마를 입은 메이드를 찾는 게 더 힘들 정도였다.
“치마 입은 메이드들은 허리 숙이지 않는 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치마 좋아하는 사람들.”
산옥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며 팔계는 감탄했다. 보통 편의보다 맵시를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산옥을 포함한 모든 구성원이 은색 산호 배지를 달고 있다는 점이었다.
“산호는 나를 상징하는 거예요.”
“어째서 자작님도 은색을 하고 계신 건가요?”
“여기에서 사는 사람이니까요. 조금 더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면 그 때 바꾸지 뭐. 은이고 금이고 그게 그렇게 대수인가.”
일하기 전, 간단한 설명을 마친 산옥이 모두에게 외쳤다.
“그러면 각자 위치로!”
“오늘 하루도 잘 부탁드립니다!”
집사장은 인사를 마치자 바로 팔계를 데려갔다. 이 날은 산옥이 영애들을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그는 집사장이 골라준 옷을 갖춰 입고 메이드장과 함께 나설 준비를 마쳤다. 그는 가다가 문득 팔계를 돌아보았다.
“할 거 없으면 같이 가든지.”
“그래도 되나요?”
“어차피 수다 떨러 가는 거니까.”
산옥은 팔계에게 말 하나를 골라주고 제 말에 올라탔다. 메이드도 말에 올라탔고, 팔계는 그들을 보다 저도 따라 탔다.
“말 탈 줄 모르는 건 아니죠?”
“탈 수 있습니다.”
“그럼 됐네. 가요.”
티 파티에 도착하자 초대한 주최와 인사를 나눈 산옥이 팔계를 돌아보고 말했다.
“새로 저희 집에 고용한 집사입니다. 인사드리세요.”
순식간에 달라진 목소리에 팔계가 흠칫 놀라 그를 보았다. 우아하면서도 품위를 갖춘, 그리고 당당한 목소리에 팔계는 저도 모르게 경직된 얼굴로 인사했다.
“저팔계 집사라고 합니다.”
그가 인사를 마치고 곧 다들 익숙하게 티 파티를 시작했다. 산옥은 자작이라는 위치에 있었지만 결코 나서지 않았다. 메이드장과 팔계가 뒤에 있었다. 주최한 남작 부인이 신호를 보내자, 앞에 여러 다과가 놓였다. 산옥은 조용히 있었으나, 의사를 표현할 때는 누구보다 단호하고 정확하기까지 했다. 팔계는 그가 한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은 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다른 귀족에게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기도 했다.
“책임감을 갖추고, 자신을 낮추는 것. 그게 제가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택한 방식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산옥은 메이드장과 팔계를 보았다. 여유롭고 확신에 가득 찬 얼굴을 본 순간 메이드장은 산옥을 보며 웃었다.
그 뒤로 며칠 간 성에 머무는 동안, 팔계는 산옥을 묘한 흡입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영애들과 만났을 때 무게감을 가진 그는 성에 있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결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모두를 앞에 두고 이야기 할 때면 이상스런 기분이 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작이 하는 일정을 보고해. 뭐가 되었든 좋으니까.”
팔계는 이곳에 오기 전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맨 처음 성에 왔을 때처럼 ‘특이사항 없음.’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산옥이 하는 것이라곤 업무를 보거나, 잡힌 일정에 참여하는 것 외에 집에서 책을 읽는 게 전부였다. 산옥은 사용인들과 책을 읽으며 토론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팔계가 고용된 지 일주일이 되어 그도 토론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보고하는 내용도 그런 것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일을 하고, 약속이 있으면 나가고, 저녁에 사용인들과 독서 토론을 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용인은 산옥이 중요한 업무로 사람을 만날 때 들어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사용인’이라는 말 안에 팔계 뿐 아니라 메이드장까지도 해당됐기에 몰래 들어갈 수도 없었다. 메이드장도 못 들어가는데 신입 집사가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메이드장보다 더 네가 신임을 얻으면 될 것 아냐!”
늦은 시각, 백작성에 가자마자 백작이 팔계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말이 쉽지. 대충 들었지만 최소 10년 이상 산옥을 보필한 그를 어떻게 단 몇 주 함께 한 제가 어떻게 따라잡겠는가. 백작도 사실 알 터였다. 알면서도 어린애마냥 떼를 쓰는 것일 뿐. 팔계는 자작성 별채로 향했다. 뭐가 목적인지 말해주지도 않고 다짜고짜 산옥을 염탐하라니. 하지만 제 누이가 백작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당장 그만두겠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팔계는 말을 묶으려 하다 뒤에서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산옥이었다.
“자작님.”
“묶지 말고 있어요. 밤 산책이나 같이 하게.”
“네?”
“꼼짝 말고 있으라고요. 나도 좀 나가자.”
“아, 알겠습니다.”
팔계는 그 말에 가만히 서 있었다. 산옥이 본채로 달려가더니 이내 제 말을 데려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안장을 얹고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팔계를 보았다.
“타요.”
“어디로 가시려고요?”
“놀기 좋은 곳?”
그게 어딜까. 팔계는 의아한 얼굴로 산옥을 보다 뒤따랐다. 산옥은 무언가를 메고 있었기에 팔계가 말했다.
“제가 들겠습니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나도 멜 수 있어요.”
대체 뭐기에 직접 메고 있나 했던 팔계는 황야에 도착하고야 그 정체를 알았다.
“느려!”
“죄송합니다!”
“아니, 여기서 왜 사과를 하냐고요. 덤벼야지!”
“네, 알겠습니다!”
산옥이 메고 있던 건 검 두 자루였다. 그는 황야에 말을 묶고 팔계에게 한 자루를 건넸다. 그리고 팔계에게 말했다.
“그거 들고 나한테 덤벼요.”
“네?”
“훈련할 사람이 많을수록 나는 좋으니까. 검술 할 줄 알아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자작님한테.”
“괜찮아요. 모조라서 베여도 안 죽어. 그리고 많이 상대해봐야 내 실력이 늘지.”
얼결에 검을 쥔 팔계가 산옥을 보았다. 그는 이미 팔계에게 덤빌 준비를 하는지 검을 정성스레 닦고 있었다. 팔계가 백작 가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그렇다면 이제 무슨 목적으로 제게 왔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메이드장이 정보를 주기는 했지만, 역시 직접 겪어보는 게 제일 정확했다. 우선 그는 팔계에게 검이 주어졌을 때,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대인지 파악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실력도 알면 좋겠지. 그런 생각을 한 산옥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살살 할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자기 실력대로 덤벼요. 어차피 나도 봐 줄 생각 없으니까.”
상황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해 어리둥절했던 팔계도 산옥이 제대로 덤벼들자 금방 정신을 차리고 산옥에게 맞부딪쳤다. 자신이 참여한 적은 없지만 자작성 내에선 훈련이 생활화되었다고 들은 바 있었다. 게다가 산옥은 훈련시킨 용병을 귀족들에게 알선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보내는 용병을 상대해주는 게 아닐까 싶어진 팔계였다. 둘은 호각을 다투고 있었다. 산옥은 팔계와 경합을 벌이며 굉장히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힘으로 밀리는 자신을 눈치 채고 일부러 발을 한 번 빠르게 굴렀다. 그 순간 발이 미끄러지며 넘어졌다. 팔계는 검을 들고 있다 산옥이 넘어지자, 바로 든 검을 던지고 산옥을 일으키려 했다.
“괜찮으십니까?”
“바보 아냐?”
“네?”
“바로 칼을 들이댔어야죠.”
“다치셨는지가 더 중요하죠.”
“나중에 적이 넘어졌을 때도 그럴 거예요?”
“비겁하게 이기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순진한 척 하는 건가 했지만 산옥은 진심으로 저를 걱정하는 팔계를 보다 눈을 느리게 꿈뻑거렸다. 내밀어진 손으로 시선을 옮기고 홱 잡아채자 팔계가 반동에 못 이겨 제 옆으로 픽 쓰러졌다.
“자, 자작님!”
화들짝 놀라 제게 새된 소리로 이야기하는 팔계였지만 산옥은 개의치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위 좀 봐요. 슬슬 해 지려고 한다.”
“놀리지 마시고요. 슬슬 성으로 돌아가셔야죠.”
“아, 들켰네?”
흘끗 곁눈질했지만 움직일 생각은 전혀 없는지 산옥은 다시 위를 향해 고개를 올렸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으로 물어볼게요. 우리 집에 왜 있는 거예요?”
꽤나 날카로운 질문에 팔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산옥 옆얼굴을 보았다. 설마 의도까지 파악한 건가. 산옥은 처연한 얼굴을 하고 이내 눈을 감았다. 덧붙인 말이 예상외라 팔계는 살짝 몸을 틀어 산옥을 따라 하늘을 보았다.
“당신 능력이면 여기가 아니라 더 높으신 분들 밑에서 일해도 좋았을 것 같은데.”
높은 분들 밑에서 일이야 지금도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걸 대놓고 말할 수가 없어 팔계는 눈을 느리게 굴렸다. 그 때 불현 듯 정혜가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작님.”
“응.”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 봐도 되나요?”
“네.”
“어떤 점이 다른 사용인 분들과 자작님이 같은가요?”
“그거 정혜가 얘기했구나?”
아차, 하는 생각에 팔계가 눈을 느리게 굴렸다. 그 모습을 곁눈질한 산옥은 키득키득 웃었다.
“정혜한테 얘기 안 할게요.”
“죄송합니다.”
“자꾸 사과만 하네. 당신 잘못도 아닌데.”
산옥은 팔계를 곁눈질하다 몸을 틀어 가까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장난스런 얼굴로 대꾸했다.
“우리하고 오래 있다 보면 알게 될 거예요.”
“역시 그럴까요?”
“그러니까 당신이 대답할 차례예요. 당신이 왜 여기에 있을까?”
팔계는 다시 질문이 돌아오자, 고민하더니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지나게 되면 그 때 알려드려도 될까요?”
“그걸 알려줄 때까지 내 옆에 있을 거라는 말인가요?”
짓궂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능글맞은 얼굴로 자신을 보는데, 그 순간 팔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른 걸 느꼈다. 이렇게 거리낌 없이 저를 대하는 사람이 처음이라 그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대답을 기다리는 게 느껴져 그는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다.”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두워지기 전에 갈까요?”
산옥은 별 이야기 아니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을 풀어주고 올라탈 때까지 팔계는 그저 누워만 있었다. 그 모습에 산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가요?”
“갑니다!”
시간이 지나 메이드장이 업무용 서재를 찾았다. 산옥은 그 안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노크 소리에 산옥은 메이드장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팔계 집사에 관련된 문제로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얘기해요.”
“정혜가 최근에 이런 것을 발견했답니다.”
메이드장이 내민 건 작은 쪽지였다. 팔계와 방에서 놀다가 책상 다리 부근에서 발견했다고 했다. 잔뜩 구겨진 쪽지를 반듯하게 펴니 ‘특이사항 없음.’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생소한 글씨체인 걸 보니 팔계가 쓴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는 메이드장에게 물었다.
“정혜가 이 내용은 알아요?”
“대충 무슨 상황인지 눈치 챈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정혜도 좀 불러와 줄래요?”
메이드장은 빠르게 정혜를 데리고 왔다. 산옥은 정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네가 아직 이걸 봤다는 사실, 팔계 집사는 모르니?”
“네, 자작님.”
“그러면 모르는 척 하고, 팔계 집사 룸메이트가 누구더라?”
“임 집사입니다.”
“그러면 메이드장은 팔계 집사가 쪽지 찾으면 임 집사한테 그냥 바닥 싹 청소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 달라고 해 줄래요?”
“네, 알겠습니다.”
“정혜는 최대한 팔계 집사 옆에 붙어서 뭐 하는지 살펴주고.”
“네!”
한편 백작 쪽에서는 팔계가 자꾸 특이사항이 없다는 보고만 하고 있자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팔계 말마따나 정말 일이 없는 건지, 아니면 그가 속이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백작은 결국 제가 데리고 있던 기사를 불러냈다. 그리고 무엇인가 귀에 속삭이고 난 뒤 몇 번이나 확답을 받아내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며칠 후, 팔계는 응접실을 청소하다 편지를 전해 받았다. 누구한테 온 건지 확인해 보니 산옥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곧 산옥이 있는 서재로 향했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산옥이 말했다.
“네.”
“저팔계 집사입니다. 자작님 이름으로 편지가 왔어요.”
“편지?”
산옥은 업무를 보다 말고 팔계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팔계가 내민 봉투에는 백작 가가 쓰는 낙인이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팔계도 백작 가 낙인을 확인하고 의아해했다. 지령 같은 거라면 산옥이 아니라 제게 와야 할 텐데 어째서 산옥 이름으로 온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봉투를 열고 편지를 읽은 산옥이 한 자 한 자 읽다가 집사장을 불렀다.
“집사장 들어오라 하고 팔계 집사는 나가 봐요.”
“네, 알겠습니다.”
팔계가 부르자, 집사장은 사용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산옥은 자기가 받은 편지를 집사장에게 내밀었다.
“읽어 봐요.”
집사장은 돋보기를 착용하고 편지를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다 읽을 즈음엔 손을 와들와들 떨기까지 했다.
“아, 아. 하느님. 아이고, 하느님.”
“아니, 그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그만큼 자작님을 함부로 대하고 있다는 건 자명하지 않습니까?”
“팔계 집사에게 특별한 보고를 받은 게 없으니 직접 움직이려는 거겠지. 어쨌든 손님이 오시는 거니까 준비는 잘 부탁하고, 그리고 여차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믿어요. 알았죠?”
“자작님.”
“나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백작한테 얻어맞는 어린애가 아니야. 알잖아요?”
그런 말을 들었지만 집사장은 여전히 석연치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산옥은 눈을 가만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웃는 그는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사랑하는 내 딸 염산옥 보아라.’
정말 가소롭군. 산옥은 첫 문장을 보자마자 그 생각을 했다. 어릴 적 백작에게 양자로 들어가 지내며 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온갖 학대를 받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집사장이 저를 품에 안고 대신 발길질에 채였던 기억은 너무나 선명했고, 크고 작은 것들이 산옥을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산옥은 자작이 되자 바로 본가를 나왔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함께 한 이들, 본가에서 버려지고 외면당한 이들을 데려왔다. 집사장도, 메이드장도, 마부도, 심지어 어린 정혜조차 본가에선 없는 이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을 데려오며 산옥은 ‘머저리 집단 우두머리’라는 몇 번이고 들어야 했다. 욕 듣는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라지만, 제가 옆에 있다는 이유로 함께 한 이들이 비난을 받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산옥은 힘을 원했고, 그로 인해 용병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왜 산옥이 그런 일을 겪어야 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답하는 게 전부였다.
“원래 가진 이들은 못 갖게 하는 사람,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법이니까.”
오늘 받은 편지 내용은 기도 차지 않았다. 마치 아직도 산옥이 어린애인 마냥 상냥하면서도 훈계하는 게 느껴졌다. 간단하게 말하면, 산옥이 요새 사교계에서 보이지 않고, 인사조차 하러 오지 않는 건 역시 친부모 중 어느 누구도 그를 가르치지 않아서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백작은 그 점이 안타까워 그런 예절이나 사교계에서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 주고, 도움을 줄 만한 남자를 데려다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결혼이나 하고 떨어져 나가라는 거겠지. 빌어먹을 새끼.”
그게 아니고야 굳이 ‘남자’를 골라주겠다고 할 리가 없다. 산옥은 본가를 방문할 때마다 백작 부인에게 이런 질문을 받곤 했다.
“결혼은 할 거지? 너 백작님한테 몹쓸 짓 당했다고 생각할 것 없다. 누가 여태까지 널 길렀는데. 자작까지 만들어 준 사람이 누구니? 그런 우리를 위해서 네가 할 일은 해야지.”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면 항상 집사장이나 메이드장이 건네주는 포도주 한 잔을 마시고 푹 자는 산옥이었다. 백작이 육체적으로 저를 괴롭혔다면 부인은 정신적으로 괴롭힌 이였다. 커서는 저를 위한답시고 본가에 남자들을 데려왔던 기억을 떠올리니 절로 헛구역질이 났다. 산옥은 머릿속으로 백작이 그 남자를 데려와 벌일 일들을 떠올리면서 나름대로 대비를 시작했고, 대비책이 어느 정도 짜이자 그는 서재에서 나와 모든 이들을 집합시켰다.
“이틀 뒤에 손님 오시는데, 손님을 위해서 만찬 같은 거 딱히 준비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단, 청소만큼은 깔끔하게 할 수 있도록 하세요. 손님 미끄러져 바닥에 머리 박고 돌아가실 정도로. 알았죠?”
마음에 안 드는 손님이 오는가보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집사장 표정이 영 좋지 않아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팔계는 상황을 가늠하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알지는 못해 눈만 굴리고 있었다. 산옥이 서재로 돌아가는 걸 본 정혜가 집사장에게 물었다.
“누가 와요?”
“내일 모레 보면 알겠지?”
“근데 난 알 것 같은데.”
“누구 같으냐?”
정혜는 곰곰이 생각하다 까치발을 들고 집사장 귓가에 제 입술을 갖다 댔다. 정혜가 한 말을 듣고 집사장은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입술에 검지를 대었다.
“거기까지!”
정혜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혀를 빼꼼 내밀고 가구를 닦기 시작했다. 정혜마저 알 법한 사람이 누굴까. 팔계는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하며 저도 청소에 매진했다. 청소가 끝나자 정혜가 팔계를 불렀다.
“팔계 집사님!”
“응?”
“동화책 읽어주세요!”
정혜는 자연스럽게 동화책 서재로 그를 이끌었다. 팔계는 당황했지만 하는 수 없이 정혜가 이끄는 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팔계가 정혜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는데, 정혜가 물었다.
“팔계 집사님.”
“응?”
“모레 우리 집에 누가 오는지 알아요?”
“전혀 모르겠는걸.”
“난 아는데.”
“정혜는 어떻게 알아?”
“백작 가에 가면 맨날 봤으니까요.”
“누구를?”
“이거 비밀인데, 약속 지켜 줄 거예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와?”
“그런 건 아니지만요! 약속 지켜 줄 거예요, 집사님?”
팔계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혜가 그에게 가까이 갔다. 귀에 대고 소곤거린 그는 팔계에게서 떨어지고 바로 제 입술에 검지를 대더니 이내 종종걸음으로 서재 문을 열고 나갔다. 팔계는 홀로 남아 멍한 얼굴로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산옥에게 백작 가가 결혼할 상대를 찾아준다니. 어떤 이유든 팔계는 썩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근 들어 자신이 산옥을 의식하게 된 뒤부터였는지 몰라도 무언가 불편했다. 그는 읽던 동화책을 책장에 끼웠다. 그리고 정혜를 따라 서재 문을 나섰다.
“들어와요.”
산옥 목소리가 들리자, 팔계는 문을 열고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손에 다과를 들고 있었다. 의아한 얼굴로 팔계를 본 산옥이었다.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적 없는데.”
“계속 서류만 보고 계셨으니 피곤하실 것 같아서요.”
“하긴 그렇네요. 그럼 조금만 쉴까.”
산옥은 기지개를 켰다. 팔계가 다과를 상 위에 올려놓았다. 음료가 두 잔 놓여 있어 산옥은 다시 의문 가득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뭐예요?”
“괜찮으시다면 저랑 차 한 잔 같이 마셔 주시겠어요?”
“할 얘기가 있나 보죠?”
산옥이 반문하자, 팔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와 대화를 하면, 백작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더 정확하게 알게 될까. 산옥은 팔계를 들여다 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차 마시는 소리만 서재 안을 채우고 있었다.
“나 바빠요. 모레 손님 왔다 가시면 그 다음날 바로 훈련소에 있는 용병 선정해서 다른 분들께 알려드려야 해. 지금 바로 시찰 나가려던 참이었으니까.”
“아, 그러시면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황한 목소리로 다음에 말하겠다는 팔계를 보며 산옥은 뭔가 있다는 직감이 왔다. 그는 바로 컵을 상 위에 내리고 팔계를 붙들었다. 잔뜩 안달 난 얼굴로 입술을 오물거리는 팔계는 평소와 달랐다. 아니, 실은 요전부터 이상했다. 말한 적도 없는데 다과를 먼저 챙긴다든가, 산옥 눈치를 많이 보는 일이 많았다. 처음에는 친한 척을 하려는 건가 했지만 고맙다며 인사치레로 웃는 산옥을 보면 시선을 피하는데, 연기하는 건 아닌가 싶어도 귓가가 홧홧하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자주 대련을 하는 일도 많은데 산옥이 밀려 지친 모습을 하면 황급히 다가와 수건과 물을 챙겨 주기도 했다. 산옥은 팔계가 움직일 수 없게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넷 세기 전까지 얘기해요.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자, 자작님.”
“하나.”
“그게. 저, 그러니까.”
“둘.”
“역시 다음에 말씀 드리는 게.”
“셋.”
“결혼, 하시는 건가요?”
“뭐?”
난데없이 한다는 소리가 결혼 이야기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산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여전히 팔계를 놓지 않았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내가 왜 결혼을 해요? 그리고,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이냐는 물음에 팔계는 입을 다물었다. 산옥이 옳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반대 급부에 있는 자신이 산옥을 두고 이런저런 사념을 갖는 것부터 무례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속에서 차고 넘치는 것들은 어째야 좋은지 몰랐다. 제 사람을 무척이나 아끼는 산옥을, 그들에게 누구보다 다정하고 상냥하게 웃어주는 그를 보며 저도 진짜 산옥이 쓸 수 있는 도구, 산옥이 품는 사용인이 되고픈 마음이 자랐다. 그러나 역시 팔계는 그런 것들을 바라면 안 되었다. 또한 그는 제가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팔계는 손목에 감긴 손을 떼어내려 했다. 바람 빠진 실소가 새었다. 그래. 무슨 자격으로 흔들리는가. 산옥이 실소를 듣고 팔계와 눈을 맞췄다. 그 순간 철렁,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자작성에 있으며 한 번도 서글프거나 슬픈 기색을 보인 적 없던 팔계가 처음으로 다른 감정을 드러냈다. 미안함과 송구스러움, 괴로움이 잔뜩 섞인 얼굴에 아주 조금은 진심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미치자 결국 산옥이 손목 대신 손을 잡았다. 온기가 번지자 팔계도 주춤했다. 그 상태로 말이 없던 산옥이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을 믿어도 돼요?”
팔계는 대답 대신 잡힌 손을 어루만졌다. 오랜 훈련 탓인지 굳은살이 잔뜩 박혀있었다. 그가 말을 고르고 있노라니 산옥이 덧붙였다.
“당신이 믿어도 되는 사람인지는 모레 알 수 있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잡은 손을 보더니 손등에 짧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손을 놓은 산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나가야 하니까 상 좀 치워줘요.”
산옥이 입을 맞췄다는 데 놀라 멍하니 있던 팔계는 들려온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다과를 치웠다.
“저녁 먹고 들어올 거니까 집사장님한테 그렇게 얘기해 주고.”
“네, 네. 알겠습니다.”
“내일 봐요.”
산옥이 옷을 갖춰 입고 손을 흔들자, 팔계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가 사라진 걸 본 팔계는 조심스레 입술이 다녀간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손님이 방문하기로 한 날, 아침부터 다들 바닥에 윤기가 나도록 구석구석을 닦고 있었다. 산옥은 드레스룸에서 집사장이 골라준 옷들을 갖춰 입었다. 매무새를 정돈한 그가 응접실로 나오자, 소박한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산옥이 모두를 불러 모았다.
“손님이 혹시라도 나한테 시비를 건다면, 그냥 보고만 있어요. 내 손님은 내가 알아서 응대할 테니까. 정혜는 손님 가실 때까지 동화책 서재에서 나오지 말고 있어. 알았니?”
“네, 자작님!”
“그러면 다들 위치로!”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차 바퀴 소리가 났다. 산옥은 나서지 않았다. 대신 집사장이 성을 나와 손님을 맞았다.
“자작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맙네.”
거만한 말투로 기사가 집사장에게 인사했다. 그는 손에 백포도주를 들고 있었다. 집사장은 그것을 힐끗거리며 문을 열었다. 모두가 일렬로 늘어서 기사에게 허리를 숙였다. 기사는 그들 하나하나를 살피다 팔계를 보곤 혀를 찼다. 마치 쓸모없는 놈이라고 말하고픈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금방 표정을 고치고 화색이 도는 얼굴로 산옥을 보았다. 그가 산옥 손목을 잡고 입을 맞추려는데, 산옥이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고 허리를 숙였다. 그에 기사는 멋쩍은 얼굴로 따라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팔계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가 속으로 안도 섞인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 기사님.”
“아이고, 자작님. 사교계에서 통 뵙지를 못해 정말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는군요.”
“아무래도 일이 바쁘면 정신이 없어서요.”
“그럼요. 일이 중요하죠. 그러지 마시고 일단 앉을까요?”
“이 쪽으로 오세요.”
산옥은 기사를 데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사용인들은 곳곳으로 흩어져 자리를 피했다. 다만 집사장과 메이드장은 산옥 옆에 있었다. 기사는 그 모습에 씩 웃으며 말했다.
“역시 자작님은 소란스러운 걸 즐기지 않으시는군요.”
“네. 아무래도 손님께 집중하기 어려우니까요.”
“이렇게 배려까지 해 주시고.”
대화가 오가곤 있지만 딱히 유쾌한 일은 없었다. 산옥도 그저 예의상 웃어주는 것뿐이었다. 한참 겉도는 대화가 오가던 중, 기사가 백포도주를 내밀었다.
“이건 백작님께서 보내는 선물입니다. 모쪼록 따님과 화해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상냥하시기도 하지.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산옥은 미소를 잔뜩 머금고 백포도주를 받아들었다. 공 기사는 백작 수족 중 하나로, 산옥은 오래 전부터 그를 봐 왔다. 망하기 직전에 있는 집안, 그 집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아들. 백작은 산옥과 공 기사가 결혼하면 집안을 부흥시켜 주겠다고 약조했다는 정보는 이미 획득했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혹은, 공 기사도 모르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 산옥은 한 발 더 앞서 생각했다.
“집사장님.”
“네, 자작님.”
“따라서 가지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여기서 따르지 왜.”
산옥은 기자가 가진 의문에 그저 장난스런 얼굴로 웃었다. 집사장은 백포도주를 가져가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 있던 팔계가 그를 발견하고 물었다.
“필요한 것 있으신가요?”
“아니, 괜찮네.”
집사장은 찬장을 열었다. 그리고 뭔가를 찾는지 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팔계는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지금 산옥이 포도주에 뭔가 들었다고 확신한다. 팔계는 찬장을 따라 뒤적이다 구석에 놓인 작은 은수저를 찾았다. 그가 먼저 그것을 내밀자, 집사장은 놀랍고도 혼란스러운 얼굴로 팔계와 수저를 번갈아 보았다. 한참 망설인 그가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 은수저를 받아들어 포도주를 조금 떨어트렸다. 검게 변색된 수저를 보자 집사장은 크리스탈 잔 두 개에 포도주를 따랐다. 하나는 가득 채웠고, 하나는 반만 채웠다. 그에 팔계가 집사장을 만류했다.
“어떤 것인지 알고도 이걸 자작님께 주신단 말씀이세요?”
“자네가 정말 자작님께 감화되어 따르고자 한다면, 이것 역시 따라야 해. 그리고 자작님은 절대 아무 생각 없이 있는 분도 아니고. 자네는 자작님을 단 10퍼센트도 파악하지 못했나?”
팔계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집사장은 잔을 챙겨 쟁반 위에 올렸다. 그리고 응접실로 가 잔을 올렸다. 산옥 앞에 잔을 놓을 때, 그는 소지를 펴 보였다. 신호를 확인한 산옥은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게 하곤 말했다.
“건배하실까요?”
산옥과 기사가 잔을 부딪쳤다. 산옥은 고개를 돌려 마시는 척하고 내려놓았다. 기사는 아무 의심 없이 포도주를 들이켰고, 얼마 되지 않아 각혈하기 시작했다. 그는 경악과 분노에 가득 차 산옥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산옥은 개의치 않고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백작 가 수족이 눈을 그렇게 뜨고 있어봐야 무섭지도 않아.”
“너, 너!”
“나한테 화낼 것 없어. 난 그냥 확인만 했는걸.”
그는 집사장에게서 검어진 은수저를 받아 기사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에 기사가 할 말을 잃고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중심을 잃은 그가 바닥 위로 쓰러지며 피가 흩어졌다. 쓰러지는 소리에 사용인들이 기사를 에워쌌다. 산옥은 기사를 바라보다 제 포도주잔을 들고 가까이 다가갔다. 측은한 표정을 지은 그가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추하지 않아? 이름 모를 작은 마을에서 데려온 어린애가 자기보다 앞설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10대에 이어 20대가 되어도 죽일 거라며 바락바락 덤벼드는 꼴이. 그리고 그 꼴 때문에 이용당하고 죽어가는 당신이.”
기사는 대답 대신 창백해진 얼굴로 연신 기침을 했다. 입가가 피로 물들었다. 손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산옥은 그런 그를 보며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망하고 싶거든 백작을 원망해. 어쩌겠어? 이 사단이 벌어진 건 그가 당신을 믿지 않았다는 뜻인걸.”
기침이 잦아들고 경련도 멈췄다. 기사는 눈을 홉뜬 채였다. 숨이 끊어진 걸 확인한 집사들이 시신을 치웠다.
“백작 가에 정중히 모셔가요.”
“알겠습니다.”
“피 닦는 거 도와줄 사람?”
그 말에 일제히 바닥과 식탁에 튄 피들을 닦기 시작했다. 팔계는 멍청히 서 있었다. 예전부터 있었던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다른 사용인들은 빠르게 뒤처리를 했다. 멀거니 서 있는 팔계를 본 산옥이 말했다.
“음식 치우고 포도주는 버려요.”
“네.”
“그리고 다 하면 업무용 서재로 와요.”
“알겠습니다.”
“정혜한테 나와도 된다고 말해주고.”
팔계는 다음 요청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산옥은 슬며시 미소 짓고 먼저 서재로 향했다. 팔계는 정혜에게 밖으로 나와도 좋다는 말을 전하고 서재로 향하려 했다.
“집사님.”
“응?”
“뭐 물어봐도 돼요?”
“뭔데?”
“집사님은 자작님 좋아해요?”
“어?”
정말 궁금했는지 정혜는 팔계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알았지만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떤 의미로 묻는 건지 몰라도 제게는 자격 없는 질문 같아 팔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뭔가 결심했는지 크게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혜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따라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러면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요?”
“뭔데?”
“자작님하고 같이 있으면 자작님 꼭 안아줘요.”
“응?”
“자작님은 맨날 싸우느라 힘드니까. 속상하고.”
“그러면 정혜가 안아주면 되지.”
“난 맨날 울기만 해서 안 돼요. 내가 울면 자작님은 안 운단 말이야.”
정혜가 한 말에 팔계는 멈칫했다. 산옥이 오랜 시간 목숨을 위협받고 사는 동안 그는 정말 제 감정을 쏟아낼 통로가 없는지도 몰랐다. 자신을 위해 백작 가를 나와 함께 하는 이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채찍질하겠지. 한 달 가까이 지켜 본 산옥은 본인이 진 무게를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팔계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동화 서재를 나온 그는 바로 별채로 향했다. 제 방에 있는 쪽지를 전부 바지 주머니에 구겨넣고 본채로 가 따뜻한 차를 들고 서재 앞에 서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들어와요.”
팔계가 안으로 들어가니, 산옥은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는 팔계가 보이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가까이 앉아요.”
“감사합니다.”
팔계가 앉자 산옥이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집사장님한테 얘기 들었어요. 은수저, 당신이 줬다면서요?”
“네.”
“백작 가 통해서 내게 온 사람이 그래도 돼요?”
“이제는 그것을 끊어버릴 생각입니다.”
“어떻게?”
팔계는 제 바지 주머니에서 쪽지를 전부 꺼내 보였다. 쓰다가 지워버린 것들 속에서 오늘 날짜가 적힌 것을 집어든 산옥이었다. 그 쪽지에는 ‘특이사항 없음.’ 이라고 적혀 있었다.
“특이사항이 없긴. 오늘 일이 얼마나 큰일인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썼으니까요.”
“응? 무슨 소리예요?”
그는 팔계가 들려준 자초지종을 듣고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차를 마셨다.
“그래서, 나랑 처음 대련한 날부터 미리 그걸 써 놓고 백작한테 보여줬다는 거예요?”
“네.”
“당신도 보통은 아니다, 진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냥 없는 것 마냥 꾸며낼 생각이었어요?”
팔계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그마한 웃음은 금방 폭소로 변했다. 산옥은 손뼉까지 쳐 가며 웃었다. 그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본 지라 팔계는 멍하니 산옥만 보고 있었다.
“내가 못살아. 아, 웃긴다. 그래서, 어떻게 끊으려고요?”
“그건 아직 생각 안 해 봤는데.”
“그럼 그건 내가 도와줄게요. 어차피 당신은 여기에 있을 거잖아요. 당신 누이는 집사장님이 한 이야기 듣고 바로 손을 썼으니까 걱정할 것 없고.”
이렇게 빨리 산옥이 대처할 줄은 몰랐기에 팔계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어안이 벙벙한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누이는 앞으로 영지 내 별장에서 머물게 될 거라고 산옥은 말했다.
“내 별장이라고 했지만 사실 잘 가지도 않는 곳이었으니까. 당신 누이 집이라고 생각하고 오가면 되겠네.”
“그렇게까지 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해야 당신 누이가 안전해요. 별장 위치가 훈련소 옆이거든. 당신은 아직 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한 걸까. 팔계는 혀를 내둘렀다. 속전속결로 해결된 데다 누이 안전까지 보장받은 게 꿈같았다. 그는 제 빈 손을 살짝 꼬집었다. 통증이 이는 게 꿈은 아니었다.
“나를 믿고 백작 등을 치겠다는데 내가 이런 거라도 챙겨줘야 하지 않겠어요?”
팔계는 산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엄청난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자신 뿐 아니라 누이까지 품에 안은 그가 한없이 커 보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팔계가 물었다.
“자작님.”
“네.”
“정혜가 제게 부탁했는데, 한 번만 안아드려도 될까요?”
“응? 뭐, 그러면 그래요.”
간단히 응한 산옥이 팔계에게 기댔다. 팔계는 그를 끌어안은 채로 작게 속삭였다.
“정혜가 그랬어요. 자작님도 많이 힘들 텐데 우시지 않는다고. 정혜가 안아드리면 자작님이 더 울지 않으실 거라고요.”
“그 애도 참.”
팔계가 그렇게 말하자 산옥은 눈을 감았다. 정혜 말대로 여러 일을 겪게 된 이후로 산옥은 울지 않았다. 책임져야 할 게 많고, 버텨야 할 것들이 많은 그였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그런 그를 알고 위해주는 이들이 있다는 게 산옥은 여러모로 감사했다. 눈물 한 줄기가 굴러 떨어졌다. 팔계는 산옥이 우는 걸 알아채고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고작 한 달 여를 만났을 뿐인데 단단한 품을 내어주는 팔계가 제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저를 위해줄 때부터 끌렸는지도 모른다고 산옥은 생각했다. 위험한 일은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좋은 일들이 일어나 그는 금방 웃음을 되찾고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그 기사가 내 손등에 입 맞추려 할 때 표정 찡그려지던데.”
“제가요?”
“그럼 누가 그랬겠어요? 그렇게 자꾸 티내면 질투인 줄 알걸요.”
“질투 맞아요.”
“네?”
“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자작님 곁에 있으면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당당하게 옆에 있으면서 언제나 자작님을 지키고, 그렇게 있고 싶은데. 안 될까요?”
온갖 행동으로 자신을 살펴준 게 좋아해서 그런 거였다니. 산옥은 새로 안 사실에 놀라면서도 집사라는 위치에 관계없이 열렬히 마음을 고백하는 팔계가 귀여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산옥이 팔계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갑자기 품에 안기자, 팔계가 눈을 크게 떴다.
“아우, 어떡하지. 나 이렇게 또래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거 처음이야.”
“자작님?”
“당당하게 옆에 있고 싶다면서 자작님이 뭐예요. 편하게 불러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그래요.”
“말은 반쯤 편하게 하고 있으면서 못 한다 하기 없기예요.”
그러고 보니 팔계는 산옥에게 해요체를 쓰고 있었다. 그제야 자각했는지 눈을 굴리는 그를 보며 산옥이 키득거렸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팔계 씨.”
산옥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팔계가 놀랐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려는데 그가 꽤 진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어 팔계는 뒤이어 올 말을 기다렸다. 진지했던 산옥은 금방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물었다.
“뽀뽀해도 돼요?”
“네?”
“왜 그렇게 놀라요. 물어보는 건데. 싫으면 안 해요.”
“아니, 저기.”
“퇴근 전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나도 다시 일해야지.”
팔을 풀고 일어나려는 산옥을 팔계가 붙들었다. 다소 상기된 얼굴을 한 그가 뚫어져라 산옥을 응시했다. 갑작스러운 긴장감에 산옥도 몸이 굳었지만 쓸어주는 손길에 금방 누그러지는 자신을 알았다. 눈을 감으니 열기가 제 입술에 닿았다. 그것은 산옥이 팔계 등을 토닥일 때까지 긴 시간 동안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팔계는 완전히 자작성 일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