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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게으르게 하품하던 기사는 갑작스런 발소리에 퍼뜩 놀라 눈을 크게 뜬다. 기나긴 태평성대는 평화를 넘어 나태를 낳았다. 전쟁이니 왕위찬탈이니 듣는 것만으로도 피비린내가 나는 단어는 가장 경각심을 지녀야 할 그들에게 잊힌 지 오래다. 여느 때처럼 지루한 보초 임무를 맡던 페인은 불청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평화를 깬 존재는 바로 레이나 칼슈테인. 칼슈테인 가의 고명딸이자 제1왕자의 전속시녀인 그녀는 무덤덤한 시선으로 문을 응시했다. 명백한 무시에 기분이 나쁠 수도 있으나 기사는 손에 땀이 맺히는 걸 느꼈다. 아무리 긴 평화가 있었다 한들 검을 업으로 삼아 제1왕자의 기사로 뽑힌 그의 감은 보통의 것과 다르다. 눈앞의 여자는 절대로 평범한 시녀가 아니다.
“왕자님은?”
“안에 계십니다.”
문을 두드리려는 손길이 허공에서 멈춘다. 미적지근한 시선이 그에게 꽂힌다. 눈빛에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기에 그 어떤 살기 어린 눈동자보다 위압감을 자아냈다.
“평소와 다른 점은 없으셨나요.”
“…다른 점이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인다. 흐음. 고민하더니 앙 다물었던 입을 열고는 장난기가 만연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예를 들자면 괴팍해지셨다든지.”
“네, 네?”
기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10년이라는 경력을 통틀어 이렇게 난처했던 적이 없다. 이 시녀와 왕자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막역한 사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신분의 차이를 무시할 순 없다. 제1왕자, 슈바이첸 폰 카이제닉스가 어떤 사람인가. 어린 시절부터 검술, 마법, 학문을 아울러 모든 곳에 두각을 나타낸 카일제닉스의 명실상부한 왕세자다. 감히 그분께 ‘괴팍하다’란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그녀라 할지라도 선을 넘었다.
“없습니다. 다음에는 발언에 주의를 기울어주셨으면 좋겠군요.”
“알겠어요. 페일 경도 좀 더 호위에 주의를 기울여주세요. 고작 시녀에 불과한 제 기척을 못 읽다니…. 왕실 기사의 드높은 명예가 실추될까 염려되네요.”
페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이에 레이나는 살포시 웃으며 집무실의 문을 노크한다. 소리가 사라지기 무섭게 안쪽에서 승낙의 말이 들렸다. 문을 열자 고급스러운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기보다는 깔끔하고 압도되는 방 안.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함유하고 있다.
“페인 경과의 대화가 길었군.”
유려한 손놀림으로 펜을 놀린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 모습이 퍽이나 불만스럽다. 레이나는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죄송합니다.”
짙은 눈썹이 눈에 띄게 움찔거린다.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버릇이다. 다행히 그의 시녀는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슈바이첸은 입을 달싹거리다 숨을 내쉬었다.
“다음부터는 바로 들어오도록 해라.”
“네.”
“용무는?”
일순 레이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검은마법사의 행동거지가 수상합니다.”
제1왕자와 검은마법사의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검은 마법사, 유리 디 아리스텔. 카이제닉스의 유력 백작가문의 여식이란 단어로는 그녀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최초의 트리플 마스터이자 만 18세의 나이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천재. 최연소로 9서클에 오른 유리는 현재 카이제닉스 제국의 살아 숨 쉬는 역사이자 영웅이다.
“증거는?”
레이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건 근거가 없는 직감이다. 아무리 뒷조사를 해도 명확한 증거를 잡을 수 없었다. 마치 유리에겐 아무런 흑심이 없다는 것처럼.
“…죄송합니다.”
“널 책망하려는 건 아니다. 나 역시도 그녀를 믿지 않아.”
검지로 톡톡 손잡이를 두드린다.
“고작 왕비의 자리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다.”
검붉은 액체가 담긴 와인잔에 싸늘한 시선을 한 슈바이첸이 비쳤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유리의 명성을 들어왔다. 결혼하기 싫다는 이유로 검술을 익히고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다는 욕구에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했다. 그런 여자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동화처럼 ‘왕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란 결말을 원할 리가 없다. ‘그리하여 영애는 왕의 목을 베고 왕좌에 올랐답니다.’라는 잔혹동화는 몰라도.
슈바이첸은 오랜 친우이자 시녀인 레이나를 찬찬히 살폈다. 그녀는 백작가의 여식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왕실을 위해서 길러진 존재다. 태어났을 때부터 무릇 귀족영애가 영위해야할 것들을 박탈당하고 고된 훈련 속에서 암살기술과 정보술을 익혔다. 오직 왕과 왕실을 위하여 한 명의 사람이 이렇게 착취 되었는데 모든 공은 그녀 자신이 아닌 가문에게로 돌아간다. 그녀는 영원히 이런 억압된 삶을 살아야 할 터. 그는 가슴 속에서 울렁이는 여러 감정을 잠재웠다.
“레이나 넌 어떻게 생각하지?”
“검은 마법사와의 결혼을 말씀하십니까?”
“그래.”
보름 전 왕실의 정원에서 마주쳤던 유리를 떠올린다. 레이나가 저를 보고 있음을 눈치 챈 유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난 더 높은 곳으로 올라 나라를 번성시킬 거야. 배필인 슈바이첸을 살뜰히 보필하겠단 말로 해석할 순 있지만 레이나에겐 왕의 목을 쳐서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겠단 선전포고로 들렸다.
“단순히 말하자면 그녀는 유력가문의 자제로 결혼을 통한 가문간의 결합은 필히 왕자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허나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왕비라는 자리에 만족했을 때의 이야기이겠지요.”
잠시 멈추고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현재로썬 심증뿐입니다. 파혼을 할 명분도 없으며 고작 심증으로 유력가문과 결할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건 또 다른 손해입니다. 밀정을 풀어 그들을 감시해야 합니다.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압박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
“단순한 정보의 나열을 말하란 게 아니다. 네 개인적인 생각 말해라.”
레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방금 전까지 했던 말들이 모두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일순 슈바이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혹시 실수한 것이 있을까. 서둘러 수습을 해보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다. 레이나, 아니 월화는 이따금씩 슈바이첸에게서 유중혁을 느낀다. 단순히 다재다능하고 과묵한 남자이기 때문은 아니다. 저 완벽한 제1왕자님께서는 가끔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마치 유중혁처럼.
“…됐다. 방금 전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좋다.”
감정을 빠르게 갈무리한 슈바이첸이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도톰한 입술이 말할 듯 말 듯 달싹거린다. 그러던 중 저의 옆에 놓여있던 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꽉 막힌 집무실엔 어울리지 않을 피크닉 바구니다.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을 터인데 출출하지 않나.”
바구니를 월화에게 내밀었다.
“먹어라.”
바구니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고소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스콘과 타르트인가. 그녀가 좋아하는 디저트다. 받아들고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는데 슈바이첸이 제지했다.
“먹고 가라.”
“네?”
“지금 나가면 또 일을 해야 하지 않나. 식기 전에 먹어야 맛있다.”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자 답답했는지 그녀를 이끌고 책상 옆에 준비된 작은 의자에 앉혔다. 높게 쌓인 서류더미. 고급스러운 잉크냄새가 난다. 이곳에서 정말 먹으라는 건가? 망설이는 월화를 무시하고 슈바이첸은 바구니 안에서 붉은 수건을 꺼내 책상 위에 깔아 두었다. 그 위로 각종 디저트를 올리고는 포크를 손에 쥐어준다.
“어서 먹도록.”
아무리 지체 높은 가문의 여식이라고 한들 왕자와 백작가의 영애는 급이 다르다. 따지지도 못한 채 월화는 포크로 케이크를 퍽퍽 떠먹었다. 꽉 막힌 집무실의 책상에서 서류작업을 하는 왕자님 옆에 앉아 디저트를 먹는다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최고의 실력을 자랑한다는 왕실의 음식은 그 이상한 상황을 뒷전으로 넘길 만큼 달콤하다.
슈바이첸은 특별히 준비한 디저트를 만족스럽게 먹는 소꿉친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실이 엉킨 듯 복잡했던 마음이 풀리기 시작하고 이내 집무실 안에선 포크와 펜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존재했다.
아직도 그의 뇌리엔 저를 지키려는 듯 앞장선 어린 등이 남아있다. 불필요한 레이스가 잔뜩 들어간 치맛자락이 피로 적셔져 있었으며 발소리를 죽이기 위해 구두를 집어던져 맨발이었다. 밤의 장막이 쳐진 복도는 무서우리만큼 어둡다. 첫눈이 세차게 내린 그날은 목숨을 앗아가려는 암살자의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맞잡은 손은 따뜻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슈바이첸은 저를 노리는 암살자의 존재에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그러나 눈앞의 소녀는 달랐다. 본디 왕자를 위해 태어난 아이. 어미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 또래의 아이들처럼 천진하게 웃지 못하고 살인의 기술을 배우는 레이나가 가여웠다. 긴 복도를 함께 달리며 슈바이첸은 필사적으로 강해지기로 다짐했다.
슈바이첸은 침구를 정리하는 레이나를 보았다. 저보다 작은 등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주인의 첫날밤을 준비하였다. 샤워를 마치고 가운만 걸치고 나온 슈바이첸은 과연 이 결혼이 옳은 일인지 자꾸만 반문했다.
“레이…….”
“왕자님 큰일입니다!”
문이 벌컥 열리고 근위대가 들어왔다. 육중한 갑옷으로 무장된 기사의 칼엔 피가 묻어있다.
“검은 마법사가 전하를…. 전하를….”
기사는 비통한 듯 고개를 떨군다. 입이 꽉 다물려있다. 침묵 속에서 슈바이첸은 아버지의 죽음을 읽었다. 검은 마법사가 결국 일을 쳤구나. 왕비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왕이 되었구나. 예상을 못했던 건 아니나 결혼 첫날부터 일을 벌일 줄을 몰랐다.
“고개 숙여요!”
반사적으로 근위병이 허리를 굽혔다. 머리 위로 비수가 공기를 가르고 지나가더니 급습한 적의 목덜미에 박힌다. 월화가 아비를 잃은 왕자의 앞에 섰다.
“저희가 최대한 막아보겠습니다.”
땅을 박차고 도약한 월화가 왕자를 살해하려는 반역자 무리를 차근차근 베어나갔다.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이윽고 방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슈바이첸은 충격에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키고 싶다. 자유를 주고 싶다. 만약 왕과 보필하는 시녀란 관계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그 순간 슈바이첸의 육체가 크게 흔들렸다.
월화는 온갖 공격이 날아다니는 혼란 사이에서 능수능란하게 칼을 휘둘렀다. 빙의한 육체는 본래의 몸보단 약하고 사용하는 스킬이 달라 불편했지만 지난 2년간 고생한 끝에 지금은 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다. 물이 흐르듯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해 다시 손을 놀렸다. 각을 잰 듯이 군더더기 없는 검술. 강력한 파괴력에도 고요하고 적막하기까지 하다. 월화라는 사람이 인생을 걸쳐 쌓아낸 역사가 그곳에 담겨있다.
몰려오는 수가 늘어나자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허리를 굽혀 목을 가르려는 장검을 피한 뒤 그대로 도약해 상대의 육중한 육체를 이등분했다. 벌써 베어 넘긴 적이 수십은 되는 것 같은데 끝이 안 보인다. 아무래도 이미 성은 검은 마법사의 일당에게 점거된 것 같다.
검은 마법사, 한수영. 월화가 카이제닉스에 왔을 때 이미 그녀는 거대설화에 먹혀 있었다. 한수영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알고 있기에 홀로 카이제닉스에서 버티고 있을 동안 얼마나 고독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늦게 온 것이 자의가 아님에도 죄책감이 들었다.
현재 시나리오는 한수영의 개입으로 본래의 방향이 아닌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머리를 굴려보지만 떠오르는 게 없다.
등 쪽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척에 월화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드디어. 가슴이 벅차오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혼란스러울 법도 한데 중혁은 그녀를 먼저 살폈다. 등을 맞댄 채로 월화가 웃었다. 당신을 오매불망 기다렸노라고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거대설화에게 존재를 위협 당하던 지난 2년이 상당히 치열했나 보지.
“왕자님. 우선 왕궁을 떠나야 합니다. 이미 성은 검은 마법사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알겠다.”
해후를 기뻐하기에 상황의 여의치 않았다. 필사적으로 적을 베어나갔다.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그쪽으로 도망치죠.”
중혁과 월화는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과 함께 좁은 통로를 달렸다. 아무리 검은 마법사가 대단하다고 한들 모두를 섭렵하진 못했을 것이다. 왕국은 혼란에 휩싸일 것이며 호의적인 세력을 모아 틈을 노리면 된다.
어두운 통로의 끝에 다다르자 빛이 조금씩 들어왔다. 찬란한 광체 너머로 한 사람의 인영이 보인다.
“정인이여. 어디를 급히 가는 건가?”
목소리에 중혁이 뛰쳐나와 월화의 앞을 막는다. 그러자 목소리의 주인, 유리가 특유의 오만한 얼굴로 천천히 걸어 왔다.
“첫날밤부터 소박맞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지 않나.”
“첫날밤부터 배신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군.”
둘은 시선을 교환하자마자 바람처럼 범인의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사라졌다. 공중에서 두 개의 신형이 부딪히고 찢겨나가는 듯한 소리를 자아낸다. 귓가가 얼얼하다. 검풍과 마력파가 섞여들고 반동으로 거세게 부는 바람에 머리칼이 나부낀다.
먼저 뒷걸음질을 친 건 유중혁이었다. 월화가 곧바로 단도를 투척해 견제해보지만 시간을 버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유리의 공격에 밀려난 중혁이 땅을 굴렀다. 아무리 초월좌라고 한들 빙의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몸을 능숙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무리였다. 유리가 가소롭다는 얼굴로 검기가 실린 칼을 내질렀다. 컁! 칼이 맞닿는다. 중혁의 앞을 막아선 그녀의 손목이 부들부들 떨렸다. 월화의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땅으로 퍼지며 유리를 붙잡는다. 왕실의 그림자로서 성장한 레이나의 마법은 주인과 닮았다. 새카만 음영이 집착처럼 유리에게 달라붙어 제지한다.
“뒤에서 숨기만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
칼을 휘둘러 그림자를 자르고 거리를 확보한 유리는 지독히도 지루하다는 시선으로 둘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슈바이첸의 기억이 중혁에게 흘러들어갔다. 수년 전 레이나의 등을 보며 안도감과 패배감이란 감정에 지배당했던 과거가 그를 괴롭힌다. 지키겠다고 다짐했는데. 굳게 주먹을 쥔 손이 떨린다. 손톱이 박힌 살결이 갈라지고 피가 흘렀다. 입술을 깨문 중혁이 벌떡 일어나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제야 재미있어 졌다며 유리가 씨익 웃는다.
중혁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콰쾅! 고급스러운 장식품이 부서져 내리고 흙먼지를 일으킨다. 소란에 기사들이 모여드는데 하나 같이 적의로 가득 차있다. 시간을 지체하면 불리해질 터이다. 중혁과 월화의 시선이 맞는다. 서로 해야 할 일을 확인하고 월화는 빠르게 페인 경에게 지시를 내려 탈출을 종용했다.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못할 것도 없다.”
검은 마나가 기사들에게 쏟아지자 월화가 방어마법을 구축해 막았다.
“오랜 시간 준비해온 건 당신만이 아니야.”
“듣기 좋은 말이로군.”
이후로 몇 번의 공방이 오고갔다. 그 사이 유리의 기사들이 둘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슈바이첸의 기사는 유리의 기사와 달리 오랜 전투로 지친기색이 만연하다.
[시간을 벌겠다.]
[도울게.]
중혁이 마나를 최대치로 끌어올려 회심의 일격을 날린다. 형용할 수 없는 마나파장이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기세에 눌린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선다. 틈을 노려 월화의 그림자가 바닥을 타고 흘러내려 적의 발을 옥죈다.
“어서 가요!”
남은 기사들이 재빠르게 탈출한다. 흑염의 불길이 그림자를 잡아 삼키고 도망치는 기사에게로 달라붙자 월화가 막아선다. 그림자의 속박에서 벗어난 기사들이 중혁과 월화를 빈틈없이 둘러싼다. 그 중심엔 유리가 있었다.
“수영아.”
[해당 세계관이 당신에게 정확한 배역을 연기할 것을 권고합니다.]
“내 이름을 잊은 건가?”
칠흑 같은 마나가 실린 검이 쏟아진다.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이 시나리오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녀와 적대하는 것이라면, 월화는 진심으로 임하는 수밖에 없다. 한수영도 그것을 바랄 터이다.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지난 희생과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 날을 흘려보내고 곧바로 빈 허리를 향해 손목을 휘둘렀다. 노련한 몸놀림에 유리의 옆구리에서 피가 울컥 쏟아진다.
“윽!”
물러선 유리가 치유마법으로 상처를 치료한다. 그 사이 기사와 공방을 나누고 있던 중혁이 그녀와 등을 맞댔다.
[슬슬 물러나도 되겠어.]
중혁이 칼로 바닥을 내리치자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땅이 흔들리며 틈이 생기고 가로수가 쓰러졌다. 그림자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자 조각상이 잘려나가 바닥에 쓰러졌다. 기사들이 기침을 해댔다. 유리가 인위적인 바람을 일으켜 흙먼지를 날려 보으나 이미 그 자리엔 월화와 중혁은 없었다.
“기사를 풀었습니다. 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고개를 끄덕였으나 유리는 슈바이첸과 레이나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유리는 몇 번 레이나와 마주친 적이 있다. 만약 왕실의 개라는 소문을 듣지 않았더라면 그녀 역시도 레이나를 평범한 하녀라 여겼을 터이다. 그만큼 존재를 감추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영리하고 치밀한 여자이니 사전에 준비한 최고의 도주로로 빠져나가고 있을 게 분명하다.
아쉽거나 화가 나진 않았다. 본디 어려운 게임일수록 승부욕이 치밀어 오르는 법이다.
“앞으로 재미있어 지겠어.”
몸을 휙 돌리자 피로 물든 망토자락이 휘날렸다.
탈출한 일당은 뒤쫓아 오는 추격자 무리와 몇 번의 전투를 치룬 후에 간신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다들 불안한 눈치였다. 한숨 돌리며 월화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헤아렸다. 중혁에게 1863회차의 기록이 있어 카이제닉스의 원래 이야기를 알고 있으나 한수영의 개입으로 본래의 이야기와 완전히 멀어졌다. 일단 제1왕자에게 호의적인 세력과 접선을 하는 게 우선이다. 우호적일 가문들의 명단을 생각해내며 중혁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떡할 거야?]
[빼앗긴 왕좌를 되찾아야 한다. 현재로썬 이게 최선이다.]
[그래. 하지만 검은 마법사는….]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유중혁다운 말이다.
[그래.]
이 대답을 마지막으로 둘은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가야할지. 보통 아비가 살해당하고 왕궁에서 쫓겨나게 된다면 아득바득 복수하는 게 클리셰이다. 하지만 복수를 한다는 건 한수영과 대적해야한다는 뜻이며 이는 그녀에게 희생을 요구해야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희멀건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라면 괴상하지만 확실한 방법으로 시나리오를 깰 수 있을 거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또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며 희생한다고 속이려 들면 화가 나겠지만. 무엇보다 한수영이 무력하게 몸을 빼앗기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차근차근 해나가자. 일단 검은 마법사와 대적할 수 있도록 세력을 키워야 한다. 머리를 굴리고 나니 조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월화가 이곳에 빙의하고 지난 2년 간 시나리오의 진전은 전혀 없었다.
[일의 진척이 없어 지루해진 참이었어.]
고개를 갸웃거린다.
[도대체 이 거대설화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김독자라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그 녀석은 쓸데없는 생각이나 안 하면 다행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월화가 빙그레 웃었다.
[왜 공단 대표란 사람 두 명이 이 모양일까.]
둘 다 고집스럽기 짝이 없다. 그 고집을 조금만 내려두면 최고의 조합이 될 수 있었을 터인데. 자기도 쓸데없는 생각 많이 하면서. 귀엽다니까. 습관적으로 월화가 중혁의 손을 잡았다. 익숙한 온기에 가슴 한구석이 뜨뜻해진다.
시간은 덧없이 지나갔다. 왕궁을 탈출하여 혁명단을 꾸린 지도 벌써 2년. 추격해오는 검은 마법사의 세력을 피하며 왕가의 전통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을 회유해 무리를 키웠다. 그리고 월화-레이나-는 명실상부 혁명단의 일등공신이다. 유중혁이 단원을 지휘한다면 월화는 은밀히 움직여 정보를 물어왔다. 이 둘의 조합은 볼트와 너트처럼 꽉 조여 빈틈없이 꼭 맞았다. 덕분에 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세력을 크게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혁명은 실패에 가까웠다. 월화와 중혁이 세력을 불리는 것보다 빠르게 유리가 무서우리만큼 왕국을 장악했다. 오랫동안 준비한 혁명이 덧없는 꿈으로 조금씩 기울여지자 단원들 사이에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슈바이첸이 선언했다.
‘정면 돌파한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유중혁이란 사람에겐 현실성이 없는 계획을 실현 가능한 것으로 군중에게 느끼게 해줄 묘한 아우라가 있었다.
일주일 뒤 제4왕자의 사형이 거행된다. 몰락한 왕조의 왕자이긴 했으나 그 과거를 인정해주어 식은 왕의 관여 하에 이루어진다. 혁명단은 이 날 왕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중혁의 결정에 월화는 끈질기게 반대하였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직까지 단 한번도 서브 시나리오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다른 때라면 귀찮을 정도로 왔을 터이다. 그러기에 월화는 시나리오가 아예 시작도 되지 않았는가는 착각마저도 들었다. 두통이 일었다. 안개가 가득한 험한 산을 걷고 있는 기분이다. 유리를 죽이는 것은 이전부터 각오했으나 막상 상황이 닥치자 주저하게 되었다. 중혁은 힘들다면 참가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무거운 육체를 이끌고 간이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정리했다. 방의 주인은 워커홀릭이라 침실에서도 일을 한다. 마지막 서류까지 말끔히 정리한 월화는 푹신한 침대로 시선을 던졌다. 아무리 쫓겨났다고 한들 제1왕자였다는 과거는 드높았던지라 그의 침실은 안락함의 결정체다. 어차피 방의 주인은 한동안 안 들어올 테고. 그간 고생했으니 잠깐의 탈선은 괜찮지 않을까.
그대로 침대로 몸을 던졌다. 폭신한 감촉이 육신을 감싸고 기분 좋게 시트가 출렁인다. 익숙한 향이 난다 했더니 중혁의 체취다. 대자로 누워 눈을 감았다.
정말 많은 일이, 그와 만나고 많은 일이 있었다. 지독한 절망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인연. 같은 출신이 아님에도 살갑게 대해주는 동료들. 가슴이 벅차오른다. 실없이 웃음이 났다. 노곤함에 눈이 천천히 감겼다. 잠에 빠지려는 순간 문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들어온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적어도 내일 돌아오신다고 했던 분이.
“이, 일찍 오셨네요.”
긴장했더니 말이 떨렸다. 침대에서 일어서려는 찰나에 시야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중혁이 월화를 시트에 눕혔다.
“……왕자님?”
“내가 널 고생시켰군.”
따스한 게 볼에 닿았다. 저의 볼이 매만져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자각하고 나자 이게 카이제닉스의 거대설화에 먹혀 미친 건가 싶었다. 하지만 거대설화가 뭘 원한다고 제1왕자에게 전속시녀의 볼을 쓰다듬으라고 하겠는가? 그럼 제정신인 건가? 모르겠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볼을 만지던 손이 입술에 닿았다. 엄지로 아랫입술을 두어 번 쓸고는 턱을 들어 올려 시야를 맞추었다. 이 인간 오늘 왜이래. 아침 잘못 먹었어? 그건 그렇고 개연성 괜찮아? 저와 중혁이 연인이라는 건 현실의 이야기이지 카이제닉스에선 제1왕자와 그의 시녀에 불과하다. 고작 그의 변덕으로 개연성 스파크를 맞아야 한다니 벌써부터 저릿하다.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진다 싶더니 이내 이마에 뜨뜻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괜찮은가는 의문보다 먼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토록 심장이 빨리 박동했던 적은 없었던 지라 현실이 아닌 듯 정신이 아늑하다. 중혁이 오만한 미소를 짓자 한순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이성이 돌아오자 객관적으로 저의 상태를 판별할 수 있었다. 그제야 이 반응이 ‘자신’의 것이 아닌 ‘레이나’의 육체의 것이란 걸 알아차렸다.
카이제닉스에서 레이나와 슈바이첸은 어떤 결말을 가졌을까. 중혁은 단 한 번도 둘의 운명을 말해준 적이 없다. 보통 카이제닉스는 빙의한 자들이 역할에 맞지 않은 일을 행하는 걸 극도로 꺼려한다. 특히나 빙의하기 전 세계와 관련 있다면 인정사정없이 경고를 보냈다. 그렇다는 건.
“…비켜주세요.”
“알았다.”
그의 품에서 벗어난 월화는 고개만 꺾어 거울에 비친 저의 모습을 확인했다. 다행히 볼썽사납게 얼굴이 빨개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조금 얼빠진 얼굴이다.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더니 몸이 붕 떴다. 가볍게 안아든 중혁이 월화를 이불 속에 넣어두었다. 일어나면 큰 화를 입을 것이다, 란 눈빛으로 살벌하게 내려다보곤 의자에 앉아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이불을 치우지도 못하고 월화가 눈만 빼꼼 내민다.
“돕겠습니다.”
“네가 굳이 도울 필요는 없다.”
“왕자님을 돕는 게 제 일인 걸요.”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중혁이 다시 침대맡에 섰다. 다소 거친 손길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씌운다. 역시 미친 게 틀림없다.
“쉬어라.”
일을 시작했는지 사각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린다. 문득 글 쓰는 소리도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피곤했던 탓일까. 밀려오는 수마를 견디지 못하고 이내 깊은 잠에 들었다.
폭발음과 함께 화려한 궁전의 벽면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단두대에 칼날을 막아 세운 중혁이 종횡무진하며 적을 섬멸했다. 이대로라면 한수영에게 도착하는 건 시간문제다. 그러던 중 이변이 발생했다.
중혁의 눈동자 한쪽이 찬란한 황금색으로 빛난다. 그 시선이 제4왕자에게 닿자 일순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아, 저 사람이 김독자구나. 월화가 선연하게 웃었다.
“왕자님 다행입니다.”
중혁과 월화를 알아본 김독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재능이 없고 망나니로 소문난 이에게 빙의하다니 절로 웃음이 난다. 두고두고 놀려야지. 월화가 방어마법을 전개하자 중혁이 이현성과 김독자를 챙기고 빠르게 왕궁을 탈출했다.
근위대와 전투로 몇 명의 혁명단이 희생되었다. 죽음에 익숙해졌을 터인데 어째서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색해 가끔은 이게 저가 맞는지 헷갈릴 정도다. 본디 스타스트림의 거대한 수레바퀴 안에서 누군가가 희생하는 건 당연하다. 월화는 더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밤하늘의 별처럼 깔린 희생에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다. 반대로 김독자는 희생에 의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 역시도 모순으로 가득 찬 인간이라 자신만은 예외로 분류했다.
당신의 결백한 기만에 애가 탔고 그러기에 우리는 불안하다. 그녀를 이곳으로 끌어온 건 유중혁이지만 완전히 정착을 하게 해준 건 김독자다. 살 희망이 없던 월화에게 복수라는 꿈의 원동력을 준 건 유중혁이지만 확신을 준 건 김독자다. 유중혁과 김독자 그리고 김독자 컴퍼니와 공단의 사람들은 월화에겐 이미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거처에 도착한 일행은 향후 일을 논의했다. 말을 나누기 무섭게 시나리오 메시지가 도착했다. 순차적으로 떠오른 장르 목록을 확인하고 있자니 허탈함에 힘이 빠졌다. 이런 식이었나. 어떤 루트가 동료의 희생 없이 결말을 맞이할 수 있는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마냥 어둡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다. 우습게도 시나리오는 이제부터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