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이 부족한 판타지 세계관.
*사망 소재가 있습니다. 행복하지만은 않습니다.
*서로를 지키고 싶은 두 사람의 이야기.
수호(守護)
메이드의 하루는 언제나 바쁘다. 일어나지 마자 밤 동안 쌓였던 저택의 먼지를 떨고 불을 지펴 싸늘하게 식었던 밤의 공기를 몰아낸다. 향긋하고 따뜻하며 속에 편한 음식으로 주인의 잠을 깨우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하면, 온종일 계속되는 청소와 빨래에 치여 해가 넘어가는 것을 막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이다. 중간중간 계속되는 주인의 호출에 꾸준한 관심을 주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엘은 그렇게 수십 년을 보내왔다.
이 저택은 그녀의 자랑이자, 그녀가 지켜야 하는 것, 그리고 그녀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
나는 조금 볼을 부풀리며 홀에 놓인 커다랗고 낡은 괘종시계를 쳐다보았다. 짧은 바늘이 9와 10 중간 즈음 걸려 있다. 당연하게도 해는 이미 중천. 아무리 종일 할 일이 없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영지의 한량 귀족이라 하더라도 슬슬 일어나지 않으면 불안한데……. 본인은 스케줄이 없을지 몰라도 메이드의 스케줄은 언제나 가득 가득이니까 말이다.
몇백 번은 왔다 갔다 했을 계단을 올라 단숨에 저택에서 제일 크고 호화로운 방문 앞에 섰다. 주인이 사용하는 침실. 문고리를 잡고 한번 심호흡을 한다. 문을 열고 가능한 큰 소리로 방의 주인을 깨운다.
“아~침이야!”
“…….”
“일어난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일어나~.”
“…….”
완벽한 무시다. 일어나 있음이 틀림없다. 어쩌면 노크를 하는 순간부터 깨어 있었을 수도 있다. 아니, 절대로 그 확률이 더 높다! 침대 옆 테이블에 들고 온 플레이트를 힘주어 내려놨다. 스프 그릇이 달칵거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오늘의 차는 스트레이트로 우려낸 아이리쉬입니다~.”
조금 날 선 투로 얘기하자 커다란 크레이프를 닮은 이불 뭉치가 살짝 꿈틀댔다. 아니, 이건 홍차 때문인가? 어느 쪽이든 반가울 따름이다.
“…… 분명 싫다고 했는데…….”
“홍차가 싫다니 주인님 주제에 별일이네. 그럼 내려가서 따뜻한 초콜릿이라도 타올까?”
“엘…….”
강수를 놓고 나서야 이불에서 머리만 빼낸 그가 여러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슬픈 눈을 지금 해도 말이지. 별로 영향 없으니까 말이야!
“홍차가 싫다는 게 아닌 거 알잖아?”
“으음~, 그럼 역시 싫은 건 초콜릿?”
“아니, 그것도…… 음, 싫지는 않아. ……아마도.”
엄청나게 싫어하는 표정이다. 이 젊은 주인님은 초콜릿을 싫어했다. 입에 남는 풍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나? 초콜릿, 달콤하고 맛있지 않나? 실제로 먹어본 지는 오래돼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엘. 이건 그만 하…….”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요~.”
모르겠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단조로운 일상에 익숙해지다 보면 조금씩, 미처 신경 쓰지 못 하는 일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야, 알아차리기 전에 먼저 사건이 끝나 있으니까. 이번에도 아마 그런 사소한 망각 중에 하나겠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넘기며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의 커튼을 걷었다. 아침 햇살이 온 방을 채우자 그제야 일어날 기분이 생기셨는지, 그가 조금 불만이 담긴 얼굴로 상체를 세우며 침대에 앉았다.
“그런 얼굴 하지 마시고~!”
그의 손에 마시기 좋게 식은 찻잔을 들려주었다. 물끄러미 찻잔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던 그는 한숨을 한번 쉬더니 찻잔에 입을 댔다.
“…… 향이 좋네.”
당연하지. 내가 홍차를 몇십, 아니 몇백 번 우려봤게?
“그렇죠, 주인님?”
의기양양한 기분에 짐짓 조신한 척을 해 보이며 무릎을 숙였다. 흔히 말하는 레이디의 인사 법. 고개를 숙였다가 드니 아직도 조금 곤란한 표정을 한 그가 보였다. 오늘의 아침은 나의 승리로 괜찮은 거겠지?
“다 드셨으면 벨을 울려 주세요~. 그럼 전 이만!”
“자, 잠시만?”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재빨리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등 뒤에서 다시 한번 그의 한숨 소리가 들린 기분이 들었지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유감이지만 누구랑은 다르게도 메이드 씨는 굉장히 바쁘답니다!
***
아침 청소를 끝낸 후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향하려던 찰나 사용인 용 방에 달린 종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네네~. 갑니다~!”
들리지 않을 대답을 하며 그의 방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고 힘을 주려고 하는 순간, 문이 먼저 열리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어, 어어?
“에, 엘!?”
당황으로 물든 예쁜 눈동자와 부딪힌 것도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품에 안겨 바닥에 넘어진 상태였다. 나를 생각해 준 것인지 내 몸은 한 군데도 바닥에 닿아 있지 않다. 주인님을 완충재 삼아 깔고 앉은 메이드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 주인님? 괜찮아? 죄송합…….”
“…….”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어쩐지 창백한 얼굴빛과 꼭 닫혀 열리지 않는 눈꺼풀. 입술이 바짝 말랐다. 아까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주인님…!”
조용하다. 일어나. 떨리는 손가락을 그의 하얀 볼로 옮겼다. 미지근한 온도의 살결이 손끝에 닿았다. 아니, 조금 차가운 것도 같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했지? 침착하게 비상 시의 행동 수칙을 기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잊고 싶은 기억만이 악귀처럼 나를 물어뜯었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어. 하얗게 질린 그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와, 그리고…….
그리고 손을 붙잡혔다.
“~~~!!!”
“…… 놀랐어?”
심장이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평소의 눈웃음을 짓고 나를 올려다보는 그. 여느 때와 똑같다. 상냥하지만 가끔은 장난기가 있는, 언제나의 그의 모습이다. 안심감에 몸에서 힘이 빠졌다.
“미안, 미안. 조금 장난칠 생각이었는데…….”
네, 이번 건 조금 심했네요……. 그가 상체를 일으켜 그의 품에 축 처진 채 안긴 나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나를 놀라게 만든 건 그인 주제에 안심되는 것도 그의 품속이라니. 이 얼마나 모순적이란 말인가.
“정말…….”
“죄송합니다…, 후후.”
정말 미안해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가지만 내 의지와 관련 없이 움직이는 가슴 어딘가는 이미 그를 용서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럴 때만은 이 막무가내 주인님 상대로 한없이 무른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진다.
“역시 버릇을 잘못 들였나 봐…….”
“무슨 말이려나~.”
못 들은 척도 선수급이다. 조금 심통이 나서 고개를 들어 그를 째려보았다. 그는 또 쿡쿡, 목울대를 작게 움직이며 웃더니 부푼 내 볼을 찌르며 장난을 시작했다.
“역시 반성하고 있는 거 아니지!”
“에~? 아니야, 아니야. 반성하고 있는걸?”
“거짓말.”
“음~, 정말인데. 아, 그럼 사과의 의미로.”
아이처럼 방긋 웃으며 손을 잡아 왔다. 평소처럼 따뜻한 손이다. 체온은 낮아도 손만은 따뜻하다며 자랑하던 그의 모습도 떠올랐다. 아까의 차가운 기운은 역시 기분 탓이었나? 내 심란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소풍 가자.”
갑자기요?
“안 돼…?”
금방 눈썹의 각도를 내리고는 고개를 기울인다. 이런 표정은 대체 어디서 배워온 건지. 내가 그의 이런 표정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하는 행동이니 질이 나쁘다. 나쁘지만…….
“데이트, 하자? 응?”
내 귀 옆에서 속삭이는 그.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내가 있었다. 역시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내가 더 질이 나쁘다. 얼굴이 뜨거웠다. 뜨거운 얼굴을 식히려 작게 손 부채질을 했다. 그는 그것을 보고 또 웃었다.
내 손을 잡고 나온 장소는 안뜰 정원. 잘 관리된 화단과 다듬어진 초록빛 잔디. 하나하나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아름다운 화원이다. 거기에 적당히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이 어디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그래, 소위 ‘완벽한 소풍’의 모습이다. 가져온 식탁보를 돗자리 대신 깔며 그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듣기 좋았다.
“후후, 다행이네. 날씨가 좋아서.”
“… 뭐, 나쁘지는 않네~.”
급하게 만들어 온 샌드위치를 나무 바구니에서 꺼냈다. 오늘 아침 새로 구운 하얀 빵에 포도 잼과 버터를 바르고 치즈와 야채를 사이에 끼운 약식의 것이었지만 이렇게 차려 놓고 보니 나름대로 분위기가 난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조금 들뜬 기분이 되었다.
“엘, 여기.”
그가 여유롭게 자기 옆의 자리를 톡톡 치며 손짓을 했다. 그의 눈꼬리가 치사할 정도로 예쁜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미인계는 반칙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의 곁에 앉았다.
“나는 엘도 미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내 생각 읽지 말아 주세요! 대체 이게 어디가 인간이라는 건지. 그는 이렇게 말로 내뱉지 않은 생각을 읽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오랜 세월 같이 있어도 이것만큼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표정으로 생각이 티가 나는 편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어째서 그에게는 예외인 걸까.
“이상한 주인님.”
내 볼멘소리를 그는 또 웃음으로 넘겼다.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그는 곧 앉은 자리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 돋은 들꽃에 관심이 팔렸다. 긴 손가락으로 톡, 톡 가볍게 꽃잎을 건드렸다. 탄력 있는 줄기는 건드릴 때마다 살짝 밀려났다가 제자리로 돌아와 작게 몸을 떨었다.
“이 꽃, 엘을 닮았네.”
그 말, 장난치기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요?
“그걸 말한 건 아니었는데…….”
아아, 또! 억울한 마음을 담아 그를 흘겨보지만, 그의 눈길은 아직 들꽃에 머물러 있다. 작고 동그란 꽃잎이 대여섯 개 모인 하얀 꽃은 나름대로 소담스러운 귀여움을 갖고 있었다. 그가 조곤조곤 꽃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꽃, 한 번 피고 지더라도 뿌리는 겨우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다음 봄에 다시 꽃을 피운대.”
“헤에…….”
사실 뭐가 닮았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열심히 듣고는 있는데……. 비슷한 점이라고는 내 머리카락 색이 이 꽃잎의 색과 조금 닮았다는 것밖에는 없다. 일단 꽃과 닮았다는 말에 순수하게 기쁜 마음은 있지만.
“…… 모아서 침실 화병에라도 꽂아 놓을까?”
“음…….”
조금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거절은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 꽃잎도, 나는 지키고 싶으니까.”
“……?”
금세 ‘이 쿠키, 초콜릿 칩은 안 들었겠지?’ 하고 가져온 쿠키를 반으로 쪼개는 그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할 시간은 없었다.
***
잠깐의 즐거운 ‘소풍’은 그가 갑자기 마른 기침을 시작하며 끝났다. 말로는 괜찮다면서 허구한 날 무리하는 그를 가만두고 볼 수는 없었다. 고집을 부리는 그를 끌고 실내로 들어와 억지로 소파에 앉히고는 두꺼운 양털 블랭킷을 안겼다.
“정말…! 무리하지 말라고 언제나 말하는데도…….”
“하하…, 오늘은 분명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는 또 곤란한 웃음을 짓는다. 아직도 조금 고통스러운지 잔뜩 찌푸린 미간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덩달아 내 미간도 좁아지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내일까진 외출 금지니까!”
“에에~?”
“그런 얼굴 해도 소용없답니다~!”
그의 몸 상태에 대해서만큼은 강경한 태도를 가지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무표정의 그는 날카로운 고양이처럼 생긴 주제에, 이럴 때만은 산책을 금지당한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다. 그렇지만 이 표정에 속아 넘어가서 후회한 적이 몇십 번인지 셀 수 없다.
“오, 오늘만은 정말 안 돼!”
… 노력하는 중이다. 정말로!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창의 덧문을 신경질적으로 잡았다. 어쨌든, 그의 몸은 소중하니까.
“음……?”
저 멀리 숲에서 한 무리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동시에 한기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상해. 싸한 느낌에 늘어진 커튼을 살짝 걷고 창문 너머를 살폈다.
“에……?”
건물 안에서도 보일 정도로 길게 대문 앞을 막고 늘어선 사람들. 하나같이 무장을 한 군인들이다. 금방이라도 저택의 대문을 무너뜨리고 돌격할 것 같은 군대는 황국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반란군의 가문……. 이건 그 죗값이다.”
말을 타고 선봉에 선 기사단장의 말이 귀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똑똑히 들렸다. 반란군? 죄? 무슨 소리야? 한낱 몰락 귀족일 뿐인 그에게 대체 무슨 볼일이란 말인가. 몸이 약한 그는 수도 구경을 해본 지도 이미 몇 년이 흘렀다. 반란 따위 일으킬 힘도, 세력도 없다.
“엘…? 무슨 일 있어?”
“별일 아니야.”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의문을 표하는 그에게 재빨리 대답했다. 조금 이상한 것을 알아챘는지 기대앉아 있던 소파에서 조금 비틀대며 일어났다. 이런 일을 그가 알아서는 안 된다! 그가 바깥의 상황을 알지 못하도록 창문을 몸으로 막고 커튼을 쳤다.
“어…… 아, 아무래도 토끼가 또 상추를 뜯어 먹은 것 같아! 잠깐 나가서 우리에 넣어두고 와야겠어.”
“응? 그럼 나도 같이 갈게."
“안~돼! 약속했잖아? 얌전히 방 안에 있도록 하세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고는 그에게 등을 보이고는 방을 나왔다. 속아 줬으려나? 속아주는 척한 걸까? 그를 완벽하게 속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저……. 잠시만 시간을 벌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가 있는 방 문고리를 살짝 만지작거리던 나는 이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
나와서 본 인원수는 생각보다 적었다. 몰락한 귀족이라고 얕잡아 보인 모양이다. 기뻐해야 하는지 화내야 하는지 모를 상황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희망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이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해. 할 수 있어.
“엘, 괜찮아. 이건 그를 지키기 위해서야.”
입속말로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그들의 앞에 섰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저들끼리 뭐라 대화를 하고 있다. 기회는 그래, 조금이라도 빨리 잡는 사람이 이긴다.
눈을 감았다. 까맣게 물든 시야 위에 가상의 선을 그린다. 원, 직선, 그리고 곡선. 부분마다 흩어져 있던 점의 집합은 점차 합쳐져 하나의 그림이 된다. 눈을 뜨면 머릿속에 그린 것과 똑같은 마법 진이 인간들의 발밑에 놓여 있다. 어느 동양 국가의 도자기 무늬와 같은 푸른색의 선화를 그들은 멍청하게 지켜본다. 그리고 차례차례, 그 위로 무릎을 꿇는다.
푸르게 빛나던 선은 이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자연의 색치고는 이질적인 그것은 그의 눈동자 색과 닮아 있었다. 아름다운,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의…….
“엘! 그만해!”
“… 에?”
깊은 보라가 나를 들여다본다. 갑자기 앞을 막아선 그 때문에 한순간 집중이 흐트러졌다. 발동되던 마법 진은 무로 돌아가고 손끝에 모였던 힘이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늦게 오지 그랬어.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몇 초 전까지 마법을 발동하고 있던 오른손에 자신의 오른손으로 깍지를 꼈다. 미지근한 그의 손이 조금 떨고 있다. 차마 그를 떨치지 못하고 굳어진 내 얼굴을 그가 다른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마치 아주 연약한 유리 공예품을 다루는 것 마냥.
“그만하자…. 응?”
“뭘 그만둬? 난 너를 지키고 있는 거야, 주인님.”
“엘은 이미 노력했어.”
“난 더 노력할 수 있어!”
나를 막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소중한 것은 지켜야 하잖아? 네게도 이곳은 소중한 곳이잖아. 그렇잖아, 주인님. 어째서 몰라주는 거야.
“엘도 이미 알고 있잖아? 이럴 필요 없다는 것.”
“무슨 소리야! 메이드의 본분은, 언제나 주인을 위해 희생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주인을 대신해 죽는 것까지 불사하는……”
“그러니까 필요 없다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는 슬픈 눈을 하고 있다. 나를 볼 때면 언제나 떠오르던, 계속 못 본 척했던 그 슬픈 표정이 오늘따라 한층 더 슬퍼 보인다. 그런 표정, 하지 마. 싫어. 금방이라도 그의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다.
“엘이 지금까지 내게 해 준 것들, 모두 고마워하고 있어. 그렇지만, 더는 안 돼. 나는 죄 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 행복을 누리고 싶진 않아.”
“너를 해치는 모든 인간은 적이야. 난 너를 위해서…!”
“그래서 내 방에 마법까지 걸고 날 속이려 한 거야?”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어서이다. 나오기 전, 그의 방에 교란 마법을 걸어 밖의 상황을 알 수 없도록 했었다. 시간을 벌 이유였는데, 역시 그를 재우고 나왔어야 했을까. 그게 옳은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방문을 막았어야? 후회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면서도 이리저리 사고는 흘러만 간다. 나는 너를 다시…….
“엘,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야.”
“꿈? 무슨 소리…….”
“알잖아. 나는, 이미…….”
그와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쓰러져 있던 군인들이 한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너무도 쉽게 밀려나 바닥에 쓰러졌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찰과상 몇 군데 정도야 별일도 아니다. 내일이 되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올 거야. 그렇지만 이건 지금 막지 않으면, 지키지 못한다면……. 다시 손에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안 돼. 난 그를 지켜야 해. 그를 지켜야 한다고. 나의 보석, 나의 모든 것, 나의…….
이번엔 떠나보낼 수 없어.
다시 빛나기 시작한 마법 진을 바라본다. 푸른 빛이 산란하는 광경은 언뜻 보면 매우 아름다워서, 그 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들을 조금이나마 외면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파랗게 빛나던 마법 진이 점차 하얗게 변해간다. 그리고 이제 조금만 더―
그리고 세상이 암흑에 먹혔다. 아니, 내 세상이 암흑이 되었다. 뒤에서 내 눈을 가리고 어깨를 끌어안은 그의 몸이 잔잔하게 떨리고 있다. 절대 울 것 같지 않던 그가, 울고 있다.
“엘……, 알고 있잖아.”
말하지 마.
“나는…….”
듣기 싫어.
“이미……”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봤지만, 그에게 단단히 붙잡힌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차가운 진실은 그의 입을 통해 형체가 되었다.
“…… 죽었잖아.”
어깨 위로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번져갔다. 그리고 그보다 더 차가운 그의 손이 천천히 얼굴에서 떨어졌다. 다시 내 앞으로 펼쳐진 세계는, 하얀 겨울이다. 이곳도 저곳도 시야가 닿는 곳은 전부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원. 그와 나만이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멀거니 서 있다.
“언제부터 알았…….”
그를 볼 용기가 없다. 나는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선의 따위로 가릴 수 없는 깊은 거짓말. 긴, 아주 긴 시간 동안 계속 쌓인 거짓은 오랜 시간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책의 먼지처럼 쌓여 진실을 가렸다. 엉성한 ‘연극’을 어느새 ‘현실’로 믿게 될 정도로. 그의 가문을 지키는 수호신에서, 그를 지키는 메이드로 완벽하게 분한 나만의 무대. 아름답고 행복한 비극.
“그러게……. 완벽하게 기억난 건 아주 최근이려나.”
“…… 그래.”
“엘, 아니…….”
조금 망설이던 그는 내 옛 이름을 입에 담았다. 오랫동안 불리지 않아 사람들에게 잊힌 신의 이름을 그의 마지막 소환자가 부른다.
“이제, 나를 지키지 않아도 괜찮아.”
“…….”
하지만 그게 내 존재의 의의였는걸. 너를 수호하는 일이 내 모든 것이었어.
“알고 있어.”
그가 천천히 다시 내 손을 잡는다. 따뜻하다. 차갑다. 아니, 차가운 것은 내 쪽이다. 그가 힘을 주어 나를 돌려세웠다. 상냥한 그의 얼굴이 나를 바라본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 버리는 마지막의 향기가 우리를 감쌌다.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자꾸 흐려지는 것이 아쉽다.
“고마워.”
그가 웃고 있다.
자,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야―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나는 결국 그의 힘이 되었을까? 모르겠다. 모르겠다. 그저 조금… 쉬고 싶었던 걸지도. 마지막 힘을 다해서 나를 보고 있을 그에게 웃어 보였다. 알고 있어, 주인님?
나는, 너를 만나서 행복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
…
정신을 잃은 그녀를 안아 올렸다. 한 가문의 시작과 끝을 지켜낸 수호신의 마지막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녀의 눈꼬리에 달린 물방울을 살짝 닦아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나의 여신님.
그녀의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다음엔, 내가 너를 지킬게.
***
“…모 군! 마모 군!”
“에?”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하얀 얼굴. 익숙한 자줏빛의, 반짝이고 커다란 눈동자.
“…… 에루?”
“? 응, 에루 쨩이야~.”
정신이 든 곳은 하얀 벽의 병실. 바닥에서 몇 뼘 위에 둥둥 뜬 상태로 나를 빤히 들여다보는 하얀 유령은 쾌활하게 말하며 시야를 가득 채웠다.
“마모 군도 졸 때가 있다니, 별일이네~.”
“꿈을 꿨어.”
“꿈?”
이건…, 꿈이라고 해도 괜찮은 거겠지?
“에루가 나오는 꿈…….”
“나?”
“응…….”
덜 깬 정신은 언어의 브레이크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되물음에 순순히 모두 대답을 했다. 어쩌면 나는 꿈속 그녀의 마법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나, 거기선 살아 있었으려나~?”
“어?”
생각지도 않은 물음에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왜?’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녀의 눈에는 순수한 호기심만 가득하다.
“설마 에루 쨩 또 유령이었어?”
“아니, 유령이었던 건 에루가 아니라…….”
“?”
“… 아니야, 아무것도.”
나였어, 같은 소리는 할 수 없었다. 그녀라면 분명 슬퍼할 테니까.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이내 기울였던 몸을 바로 하더니 다른 주제를 입에 담았다. 흥미를 잃은 척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 틀림없다.
“… 그것보다, 그것보다, 이거 어때~?”
“이거?”
“뭔가~ 요즘의 고교생들은 이런 거 좋아한다던데? 메이드 씨~.”
핑그르르 공중에서 돌다가 멈춘 그녀의 옷이 어느 틈엔가 심야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법한 짧은 스커트로 바뀌어 있다. 현실 고증 따위는 아키하바라에 팔아먹었을 법한 일본식 메이드 복이다. 허벅지 반 정도 오는 스커트에 하얀 프릴이 달린 앞치마, 무릎을 살짝 덮는 검은 니삭스까지. 완벽한 서브 컬처 속 메이드 씨로 변신한 에루의 모습에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에……, 그거 누가 말했어?”
“응? 란란 쨩이~.”
역시나. 예상은 했었다.
“음……, 조금 다르려나~.”
“에~? 그치만 마모 군도 저번에 했었잖아? 이렇~게 토끼 귀 달고.”
에루가 손을 머리 위에 붙이고 토끼를 흉내 냈다. 귀엽기는 한데 조금 복잡한 심경이랄까. 확실히, 비슷한 것을 하긴 했었다. 그렇지만 그건 메이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뭐, 귀여우니까 넘어갈까. 이 순간에도 그녀는 팔랑팔랑 내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다. 프릴과 레이스가 가득한 스커트 자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굉장한 말괄량이 메이드 씨구나.
“후후, 보통의 메이드 씨는 그런 동작 안 하지 않으려나.”
“에, 그렇지만~ 메이드 같은 것 실제로 본 적 없으니까 모르겠는데?”
아니야, 엘은……. 무심결에 반박하려던 입술을 닫았다.
“아, 란란 쨩이 그랬어. 뭔가… 이럴 때는 상대방을 이렇게 부른다고.”
별안간 에루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땅으로 내려앉았다. 우아하게 스커트 자락 끝을 잡더니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어때, 주인님……?”
살풋 웃는 모습에 또 다른 얼굴이 겹쳐 보였다.
“어때? 이 정도면 나도……. 우왓!?”
조금 성급한 몸짓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금방이라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것 같은 그녀는 의외로 간단하게 품에 들어와 그 존재를 증명했다. 이 따뜻한 온기는 현실일까, 내 착각일까. 이제는 알 수가 없다. 유일하게 내 감각을 전부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존재, 그러면서도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보일 수 있는 존재.
이번엔 지키고 싶어. 내가, 너를.
“에? 에? 마모 군!? 에?”
“미안……. 지금은 조금만…, 이렇게 있어 줘.”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댔다.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손을 올려 내 등을 토닥이기 시작한다. 작은 손바닥이 나를 보듬었다. 그녀의 투명한 연보랏빛 오오라는 그 자체로 위로였다.
“마모 군, 악몽이라도 꾼 걸까~?”
“그건……, 아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악몽은 아니야. 아니었어, 에루. 왜냐면 나는…….
“행복했어?”
“…… 응.”
“그럼 됐어~.”
나를 안아주던 에루가 몸을 떼더니 공중에서 기지개를 켰다. 팔랑팔랑 다시 한번 나비처럼 하얀 병실을 돌며 잠시 생각을 하더니 포르르 내가 앉은 침대로 다시 날아와 내 옆에 앉았다.
“마모 군이 행복하면 그걸로 괜찮아~.”
뒤이은 말은 지극히 그녀다운…, 아니, ‘우리’다운 언어의 집합이다. 우리는 어쩌면, 언제나 서로의 행복을 수호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평상시보다 빠르게 뛰던 박동이 이제서야 제자리를 찾는 것이 느껴졌다. 에루를 만나서 다행이야. 언제나 떠올리는 생각을 오늘은 더욱 강하게 되뇌었다.
“행복한 사람 옆에 있으면 나도 행복해지는 법이라고?”
“그럼 에루는, 내 옆에 있으면 행복해?”
“에?”
“나도, 에루가 옆에 있어서 행복해.”
“~~~!!”
“… 후후.”
“정말~! 놀리지 말라니까?”
금방 뺨을 붉게 물들이고는 내게 소리치는 그녀가 사랑스럽다. 괜히 달래 줬다는 둥 못 본 척했어야 했다는 둥 볼멘소리를 하는 에루의 작은 주먹을 다시 감싸 잡았다.
“고마워, 에루.”
“정말…….”
“그렇지만, 진심인걸? 나와 만나줘서, 고마워.”
작게 ‘나도…….’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잡은 손을 깍지로 바꾸고 창문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하나둘 별이 떠오르는 시간. 행복하다. 앞으로도, 행복하겠지. 나의 행복을 지켜주는 수호자 씨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테니까.
너를 지켜줄 나도, 여기에 있어.
수호(守護)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