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하늘이 흐렸기 때문에 못해도 오후엔 비가 오겠구나 하던 것이 현실이 되어, 점심시간이 막 지날 무렵 하늘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를 뿜어내었다.
최근 비가 전혀 내리지 않았으니,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겐 꽤나 달콤했다. 설탕물을 만난 벌처럼 그들은 좋아했다.
빗소리를 음악 삼아 사람들은 이런저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창밖의 풍경은 좋은 그림이 되어주었다. 이 말은 단순한 비유인 것이 아니었는데, 실제로 창밖의 풍경은 유명한 화가가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잘 손질된 정원과 매 계절마다 잘 어울리는 꽃과 나무들. 어느 것 하나 부조화 같은 것이 없었다.
비록 구석진 곳에 지어진 저택이었지만, 매년 이곳에 찾아오는 손님이 늘어나는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저택의 주인이 관리를 잘해서 라는둥, 사실은 그 부인이 손재주가 좋아서 그렇다는 둥 이야기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달랐다. 이 저택의 가주도 그의 부인도 정원을 관리한 적은 없다. 이 저택의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은,
“비 오는데 왜 또 나와 있어?”
“하지만, 수국은 비가 오는 날 에 봐야 더 예쁘잖아요. 같이 봐요!”
“...감기 걸려도 난 몰라.”
“감기 걸리면 토우마가 돌봐 줄 거니까 괜찮지 않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토우마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거 백퍼 감기 걸릴 거야. 그렇게 혼자 속으로 생각하며, 감기에 걸리면 또 어떻게 돌봐줘야 하나 하나하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화만 들어보면 전혀 그렇게 안보이겠지만, 일단 그는 고용인이었다. 음, 그러니까 집사라 고하던가? 이미 제 앞의 아가씨를 모시기로 한 뒤로 그런 형식적인 이름은 버린 지 오래였다.
흔히들 말하는 집사가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물론 자신이 모시는 그 아가씨가 명령한 거니까 조금은 상황이 다를려나? 뭐 어찌되었든 그의 입장에선 지금의 상황이 좀 더 편하고 마음에 들었다. 워낙에 불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조용히 모실 리가 없었으니까...
“다음엔 무슨 꽃을 심어볼까, 여기에선 쉽게 구할 수 없는 꽃들도 심어보고 싶어요. 다음에 날이 맑을 때 같이 시장에 나가주세요.”
“당연하지. 아가씨의 부탁인데 들어드려야지요.”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일단은 사용인으로서... 아니 됐어. 역시 나랑 안 맞아.”
“그런 성격으로 잘도 여기에 와서 일하려고 했네요.”
“...비꼬는 거지?! 하여간, 쇼타랑 자주 밖으로 나가더니 이상해졌다니까.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무슨 대모할머니 같은 말을 하시는 건가요???”
두 사람 사이엔 웃음이 끝나지 않았다.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색해서, 하루에 할을 두 번이라도 주고받으면 많이 주고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슬슬 들어가자. 바람도 슬슬 불기 시작했어.”
그 말대로 바람이 불어 들어와 마룻바닥은 서서히 촉촉해지고 있었다. 더 보고 싶었는데... 라고 중얼 거리면서도 이정도도 많이 봐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바람에 헝크러진 제 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차분히 방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으로 밖을 보면 되지 않나? 싶겠지만, 방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나쁘진 않았다. 빛이 없으면 불을 밝히면 되고, 밖의 소식이 궁금하면 방문을 열어두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비가 오는 날은 조금 아쉽다고도 종종 생각했다.
“가끔... 토우마가 날 돌보러 내려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해요.”
“그래?”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고, 본관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가족들도 기다리고 있잖아.”
“그건 아직 무리에요. 이제 겨우 밖을 나갈 수 있는 정도일 뿐이니까... 아직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건 힘들어요. 물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도... 아, 하지만 토우마랑 이야기하는 건 재밌으니까 괜찮아요.”
말을 끝맺으며 입 꼬리를 들어 올려 살포시 웃어보였다. 웃음이 정말 잘 어울리는 얼굴이라고 앞의 토우마는 생각했다.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웃는 얼굴만큼은 언제나 새롭게 눈동자에 담겨왔다.
“나야, 여기서 적당히 놀면서 일하니까 좋지만…….”
문뜩 토우마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생각했다. 처음엔 본관에서 일을 하고 있던 그였지만, 어째선지 갑자기 별채 쪽으로 내려가서 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말이 별채지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별채까지 늘어선 정원의 꽃길은 정말로 아름다워서 감탄하며 내려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 까지 만해도 그는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그룹이 따로 있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애초에 그랬다면 어느 날의 한번 정도는 마주쳤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한 사람이 돌보는 것이고(정확히는 두 사람) 그 사람은 늘 사람이 밖의 정원을 신경 쓰지 않을 시간에만 나타났다. 거기다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설마 저 사람이 관리하는 거겠어? 라는 편견도 한몫했다.
사실을 알고 나서는 엄청 놀랐었지……. 라고 그는 추억에 잠겨있었다. 그렇게 하나 둘, 이것저것을 떠올려보니 방울처럼 떠오른 추억들이 하나 둘, 터지며 그리운 향수를 불러왔다.
“그러고 보니까 처음 만났을 때 한 대화 기억나?”
제법 더운 날씨였기에, 별채까지 제 발로 걸어 내려온 토우마는 다소 예민해져있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이곳에 있는 거야? 호기심 섞인 발걸음으로 그는 별채의 문을 열었다. 철로 되어있는 문은 끼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별채라 그런지 정원은 훨씬 작았지만, 아름다움으로만 비교를 해본다면 이곳이 훨씬 더 아름다워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짧게 감탄을 하고는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옆을 돌아보았다.
“헉. 죄, 죄송해요!!”
그리고는 미닫이인 방문을 큰소리가 나게 닫아버렸다. 토우마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며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만했다. 다행이 이런 쪽으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탓에, 금방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눈에 비친 얼굴이 누구인지는 예상이 가능했다. 아니 애초에 여기에 온 이유가 그 사람 때문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별채에만 산다는 아가씨가 저 사람인가. 익숙해지려면 꽤 오래 걸리겠는데...”
제 갈색 눈동자를 두어 번 빠르게 깜빡이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겁에 질린 소 동물을 돌보는 느낌이 이런 건가? 조심히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잠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아가씨?”
답은 곧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토우마는 기다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살짝 열리면서 얼굴이 빼꼼, 튀어나왔다.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꽤나 당황스러웠다.
“정원 가꾸는걸 좀 도와주세요.”
“뭐? 아, 아니 네?”
“오늘 하지 않으면 내일부턴 장마가 시작되어요. 그러니 도와주세요! 어, 어차피 나, 나나를 위해 왔으니까.. 이 정돈 부탁해도 되는 거죠!? 워, 원래 도와주던 사람은 가버렸으니까...”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고. 얼굴도 점점 방안으로 들어갔다. 죄송해요 너무 무례했네요.. 하고는 방문을 닫으려했다. 하지만 토우마는 방문을 닫지 못하도록 문을 잡았다.
“당신 말대로, 그러기위해서 온 거니까, 뭐든 마음껏 시켜주십시오. 음, 이렇게 말하면 너무 딱딱한가? 아무튼, 편하게 시켜달라고!”
아가씨는 주인 같지 않았고, 집사는 사용인 같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수군거릴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이건 그들의 세계 인거니까.
“다짜고짜 정원이 어쩌구 해버리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고.”
“...미안합니다.. 하지만 정말 급했다구요! 정원을 가꾸는 게 유일한 할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날 정원을 꾸몄으니까 당신이랑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거겠지.”
“그렇죠... 와준 사람이 토우마라서 다행이었어요. 아, 이제 곧 점심 먹을 시간이네요. 오늘 점심은 카레인가요!?”
“당연하지! 오늘 만드는 카레도, 낙승! 이라구!”
“모처럼 인데 같이 만들어요.”
“...좋아. 그럼 주방까지 모셔가겠습니다. 아가씨.”
어느 샌가 비가 그쳐 하늘은 맑았다. 정원의 수국들은 물방울을 머금은 채, 햇빛을 받으며 빛을 내고 있었다. 그 어떤 화려한 조명보다도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아, 내일 사오고 싶은 꽃이 있는데 뭐냐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