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소란스러운 날이었다. 조용히 일하고 있었을 뿐인데 다짜고짜 ‘도련님이 사라졌어!’라고 말하며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고 무작정 찾는 일이 우선이라며 끌고나가더니 어서 찾아오라며 최고참인 늙다리 메이드장이 날 다그쳤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다들 멍청하다. 도련님인지 뭔지, 엄청난 길치라구! 또 어디서 길 잃고 느긋하게 창문 밖이나 보고 있겠지. 이게 뭐라고 다들 소란인걸까. 얼른 오늘 안에 끝내놓으라며 방금 나한테 일을 주고 간 건 기억 못 하는 건가? 이러니까 다들 사람하나 제대로 못 찾고 소란이겠지? 아아, 그냥 대충 찾는 척만 할래.
투욱.
“응? 나뭇가지가 떨어졌잖아?”
튼튼해 보이는 나뭇가지가 그냥 떨어질 리가 없었다. 그런 걸 본다면 사람은 누구나 나뭇가지가 떨어진 것 같은 나무를 올려다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도 당연히 나무와의 의리를 생각하며 올려다보았다.
“아~”
갈색 눈동자다. 아니 갈색보다는 색이 옅은가? 색에는 감각이 없어서 무슨 색인지는 잘 모르겠네.
“얘! 유키노. 넌 또 뭘 넋 놓고 있니? 어서 도련님이나 찾아봐! 오늘은 꼭 셋이서 저녁 만찬을 즐기고 싶다고 주인어른께서 그러셨단 말이야.”
나보다 나이가 맞은 젊은 메이드 언니였다. 그래봤자 아직 미성년자였지만?
“...네. 알겠어요. 그런데 여기에 있을까요? 제 생각엔 서재 근처에 있을 거 같아요. 책 읽다 또 잠이나 드셨겠죠. 그러니 그쪽으로 가 봐요. 어서…….”
“그런가? 뭐, 넌 항상 도련님을 잘 찾았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좋아.”
“그런데 나무 가지치기 좀 해야겠는데요. 누가 나무에 숨어버리면 잘 안보이잖아요.”
“누가 그런 짓을 하겠니? 아무튼 빨리 가보자!”
나는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갈색의 따뜻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딱히 무슨 표정을 지어줘야 할지 몰라서 그냥 무표정하게 돌아보았다. 얼굴을 돌리기 전 입모양으로 뭐라고 말한 거 같지만. 오늘도 밤늦게 돌아서 들어오지 않을까? 다른 메이드들만 불쌍하게 됐네.
하여튼 멍청하고 바보 같다니까. 이 집엔 다들 멍청이 밖에 없나봐! 하긴 집주인의 아들놈이라는 그 도련님이 이렇게나 바보 같은데. 어서 이 집에서 나갈 방법이나 찾아봐야겠어! 나까지 바보가 될 거 같아.
2.
“아이고 내 팔자야. 얼른 다른 나라로 튀던가 해야지! 이러곤 못살겠다 진짜!”
“그 말, 몇 년째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넌 조용히 해. 나쁜 도련... 아니 주인 놈아.”
맑은……. 그래 아주 맑은 날씨였다. 어디론가 산책가고 싶은, 아니 산책을 나왔긴 했다. 그런데, 혼자 나오지 않았다는 게 큰 문제였다. 아니 굳이 혼자 나오지 않아도 괜찮아, 사키 쨩이랑 나왔다면 오히려 즐거웠을 거라고...
“아, 저쪽 거리 최근에 새롭게 꾸몄다고 했던가? 예쁘네.”
“야, 거기로 가지마!! 길 잃으면 찾으러 다니는 건 나라고~!!!”
그래 혼자거나 다른 사람이랑 왔다면 이렇게 귀찮지는 않았겠지! 자유를 만끽하며 즐기고 있었겠지!! 아아, 너무 가련해 나는 역시 가련한 소설 속 여주인공 인건가?
“혼자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주인님을 버리고 튈 계획을 구상 중이었어요.”
나와 길을 걷고 있는 어딘가 멍청해 보이는 이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나의 주인님이었다. 음 어릴 땐 도련님이었었는데... 왜 지금은 주인님이 되었을까?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그 날엔 조금 미쳤던 게 분명하다. 응. 아니 지금도 약간 미쳐있을지도 몰라.
“그래? 좋은 곳을 보고 오면 나한테 꼭 이야기해줘.”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굳이 대답 하지 않고 웃는 얼굴이 오늘따라 더 얄미워 보인다.
“...물건 다 샀으면 이제 돌아가자. 소이치로가 또 잔소리할거야. 늦었다면서... 참내 지가 같이 나와 보던가! 안 늦을만한가.”
궁시렁궁시렁. 솔직하게 말해서 오늘은 평소보다 더 불만을 많이 말하는 게 맞긴 하다. 하지만 원래 스트레스가 쌓이면 혼잣말로 중얼거리게 된다구.
“그러고 보니, 강에서 무슨 축제를 한다고 들었는데... 저녁에 다 같이 나와서 보러 가볼까?”
“우리야 주인이 가자고하면 가는 거지. 굳이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거든~”
“동의로 알아들을게. 그럼 딴 짓은 그만하고 이제 진짜로 돌아가 볼까. 같이 나온 친구가 잔소리를 듣게 나둘 수는 없지.”
“친구 아니고 고용된 메이드거든요.”
“하하... 뭐 됐어. 자, 어서 돌아가자.”
항상, 항상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무슨 말을 하던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저런 얼굴을 하고 웃는 건 반칙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내 마음은 항상 편안해졌다. 언제부터 이랬더라? 너무 오래 알고 지내는 것도 좋지 않는 거 같아.
0.5
“돌아가세요.”
“응?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그야 쌓아놓은 책 탑들이 조금씩 비틀려있었으니까요. 아니 애초에 전 늘 여기서 도련님을 찾았거든요? 다음부턴 조심해서 들어오도록 해요! 정리하는 건 저희들이라구요.”
책장에 미쳐 다 꽂지 못한 책을 대충 아무렇게나 바닥에 쌓아두었기 때문에 누군가 여기에 숨어있는 다면 제대로 찾기 힘든 위치였다. 아마 이 인간도 그걸 알고 이곳에 숨은 것이겠지.
“아아, 미안. 그건 그렇고 눈썰미가 좋구나.”
“아뇨, 도련님이 바보 같은 거예요.”
다른 나이 많은 메이드들이 들었다면 말투가 왜 그러냐며 꼰대 짓이나 했겠지만, 뭐 어쩔 건데 내 말이 녹음되는 것도 아니고. 여기 도련님은 진짜 바보 맞는데.
“아무튼, 고마워. 아버지가 또 나를 찾고 있는가 보구나. 항상 고마워. 그날에도 날 모른 척 해준 거지?”
뭐야? 기억력 나쁜 줄 알았는데
“...시끄러운 일에 말려들기 싫었던 거뿐이에요.”
“그래서 뒷문도 잠그지 않은 거야?”
“그건... 아무튼 그냥 잊은 거예요!”
“알았어, 알았어. 난 이만 아버지한테 가봐야겠는걸. 아, 이름을 알려주겠어?”
“...유키노에요.”
“하하, 나랑 이름이 비슷하네. 이건 신기한 걸. 내일도 여기로 와줄거니?”
“시간 봐서요.”
“그렇구나. 고마워. 그럼 내일은 느긋하게 이야기 할 수 있길 바랄게.”
저 인간 뭐야... 짜증나. 뭐가 저렇게 넉살이 좋아?! 무뚝뚝한 집주인이랑은 전혀 딴판이네... 그건 그렇고 당연하게 내일도 올 거라고 생각하면 저 말투는 뭐야? 참내, 내가 올거 같아? 내일은 절대로 안 올 거야 절 대 로!
“안녕. 오늘은 달이 예쁘지? 불빛이 없어도 책을 읽을 수 있을거 같아.”
나 너무 착한 거 아닌지?
“어차피 읽다가 주무실 거잖아요.”
“으응? ...크, 크흠. 그건 그렇고 둘이 있을 땐 굳이 격식 차리지 않아도 괜찮아. 들어보니 우리 나이도 같던걸.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 안될까?”
“...그래도 괜찮다면, 그렇게 할게. 근데 말이야…….”
“응?”
“넌 왜 항상 여기에 오는 거야?”
“그냥, 책에는 여러 이야기 들이 있잖아. 내가 모르는 세계가 담겨있고. 그리고 네가 항상 여기로 날 찾으러 와주는걸.”
성격 하난 진짜 이상하다. 저게 뭔 소리야?
그때였다.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또 내 앞의 이 도련님을 찾고 있는 소리인 듯 했다.
나는 그대로 옆에 주저앉았다. 네가 여기 있다는 걸 말하지 않을 거고 당분간 여기에 같이 있어주겠다는 의미의 행동이었다.
“...고마워.”
고맙다고 말하며 나를 향한 얼굴을 보니 묘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무슨 느낌이지 이건…….
“괜찮다면 너도 같이 책을 읽는 건 어때? 나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있어.”
“그럼, 추천해주세요. 전 여기서 책을 읽어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아니면 읽은 책의 내용을 들려줘도 좋아요. 사실... 그러는 편이 더 좋아요. 글 읽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지금 내 마음은 그 어떤 파도보다도 험하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곧 해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요동침!
“그렇다면 내가 재밌는 이야기를 알고 있어.”
1.
“뭐라고?”
“나 여길 나가서, 혼자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그게 아니잖아. 여기서 쫓겨나서 혼자 살아야 되는 거겠지.”
“가차 없네. 하지만, 이 집에서 나가는 것만으로도 난 만족해. 여긴 숨이 막히니까. 창문은 있지만, 열수가 없는 것처럼.”
“그럼……. 이제 널 못 보겠네. 손 많이 가는 도련님이 사라지는 건 좀 편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말인데... 같이 가주지 않을래?”
“네?”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늘 뜬금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지만, 갑자기? 여기서??
“혹시 싫어?”
“누가 싫대?! 그냥 놀라서 그런 거야... 어차피, 나한테 선택지는 없는걸. 나는 사용인이야. 누가 명령하면 따라다녀야 하는.”
“조금 비겁하지만, 이렇게라도 너랑 같이 갈 수 있는 건 좋은걸. 이곳을 떠나더라도 네가 없으면 정말 외로울 거 같았거든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줘. 아, 물론 너 말고 다른 사람들도 데리고 갈 거야.”
누군지는 대충 알거 같았다. 최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에, 물론 그 사람들이라면 나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재밌는 날이 시작될 것 같았다.
“아 그럼 있지, 그럼 넌 이제 더 이상 도련님이 라니라 주인님이 될 려나?”
“응? ...하하하, 그럴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늘 말하지만, 그런 호칭은 질렸어. 이름으로 불러줘.”
어? 커다란 손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흘러내린 옆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것이 느껴졌다. 그날 처음 제대로 쳐다봤던 갈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따스하게 날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나, 나나나나나 어떻게 해야 돼? 이름을 불러주면 불러주는 거지 왜 이렇게 가까워?!
덜컹.
어느 순간 서재의 문이 조금 틀어져있었기 때문에 문을 열 때는 가끔 이런 소리가 났다. 아, 살았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군 진 몰라도 긴장감이 흐르던 이 상황을 깨줬으니 나에겐 나름 은인이었다. 누구지. 한번 정돈 착하게 대해줘야지.
그날의 대화 이후 저택은 분주했다. 그 도련님의 짐을 정리하랴, 도련님이 지내게 될 작은 별장을 사람이 살 수 있게 바꿔놓으랴, 여러 사람들이 바삐 움직였다. 물론 나는 도련님의 충실한 메이드(웃음) 이라는 명목으로 한 마리의 치와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도련님의 뒷 꽁지만 따라다녔다. 다소의 귀찮음 있었지만, 먼지 뒤집어쓰며 청소하는 것 보다는 재밌었다.
지금도 메이드장이 잔소리 하는걸 대충 빠져나와 도련님의 방문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는 소리가 작게 울려 펴졌다.
방안에서는 들어오라는 언제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는 다 끝내셨나요, 도련님?”
“덕분에 무사히 끝낼 수 있었어. 모험에 어울려줘서 고마워, 유키노.”
“알면... 길을 외우는 척이라도 해보는 건 어때?”
“글쎄... 노력은 해볼게.”
“뭐, 길치도 하나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 오늘도 달이 밝다! 보름은 내일인가?
닫혀있던 창문을 제멋대로 열었다. 늘 있는 일이니, 익숙해졌겠지 뭐. 창틀에 턱을 괴고 달을 보고 있으니, 옆에 누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 새삼스럽게 왜 그래?”
“...혹시 나를 따라오는 게 억지로 따라오는 거라면, 굳이 오지 않아도 괜찮아. 말했다시피, 내가 자유롭게 살기 위해 이 집을 나가는 것처럼 나는 너도 자유롭게 살아줬으면 좋겠거든.”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계속 내 옆에 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야. 늘 말하는 것처럼. 지금과 같은 삶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어.”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렇게나 바보 같다니. 뇌는 역시 자라지 않는 건가?
“바보야. 됐어. 나, 돌아갈래. 내일 시간 맞춰서 일어나기나 해.”
“잠깐만, 유키노 난…….”
“바보야. 나 말이야. 몇 번이고 여길 벗어날 기회는 있었어. 그런데도 계속 있었다구.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 ...아무튼 됐어. 난 계속 네 옆에 있을 거야. 싫다 고해도 계속 따라다니면서 잔소리가 할 거라고~~~! 잠이나 자세요, 도련님아! 아니 이젠 주인님이지! 잘 자요!”
쾅.
문이 생각보다 세게 닫혀서 솔직히 조금 놀랐다. 하지만, 누가 그런 바보 같은 말, 하래? 바보 같고, 둔하고…….
3.
“축제, 재밌었네. 불빛이라던가. 정말 아름다웠어. 넌 이런 소식을 잘도 알아오는구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면 들리기 마련이니까. 재밌었다면 다행이야.”
“그건 그렇고, 우리 길 잃었다? 너 알고 있었어? 당연히 몰랐겠지.”
“아하하……. 미안.”
“됐어. 한두 번도 아니고, 익숙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달이나 보면서 걷자, 지구는 둥글 다잖니, 걷다보면 익숙한 길이 나오겠지.”
응? 왜 안 따라오는 거 같지? 달에 시선이라도 뺏겼나? 나는, 1초를 세고 뒤를 돌아보았다. 달빛 아래에 서있는 모습은 신비하게 느껴졌다. 어디를 보고 있는 거지, 했더니 강가에 비쳐진 빛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확 버리고 가버릴까? 하지만 몇 십 년이 흘렀지만, 난 그러지 못하는 인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잠시 생각하고 나는 입을 열었다.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었던가.
“야, 유키히로! 안 따라오면 진짜 혼자 두고 갈 거야.”
막상 입 밖으로 날려니까 부끄럽다. 많이! 하필 이름은 또 왜 비슷하고 날리람!
“별일인걸. 평생 내 이름 못들을 줄 알았는데.”
“오늘만이거든.”
“한가지, 물어봐도 돼?”
“뭔데?”
“유키노 넌, 나를 계속 좋아해줄 수 있어?”
“응?”
“왜냐면, 나는 널 계속 좋아 할 거 같거든. 대답, 해줄래?”
역시 진작 떠났어야했는데, 나도 바보가 됐나봐 안 그래?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말을, 뱉을 리가 없잖아.
“...좋아. 주인... 아니지 유키히로, 네가 내가 싫어질 때 까지 좋아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