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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복 복장을 받고 나니 이제야 정말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주인을 모시며 살아간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에 있던 집에서 유능하기로 소문이 났던 모양인지 메이드들의 총 책임자인 것처럼 보이는 그레이스 부인의 휘어진 눈매에 기대가 담겨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새로 일하는 곳은 야오토메 가문이었다. 이 가문의 주인과 부인은 그들의 사정으로 함께 지내고 있지 않았고 이 저택에서 살고 있는 건 주인과 그의 유일한 아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주인은 저택에 돌아오는 일이 드물었다. 결국, 이 저택의 소유자는 그의 아들인 야오토메 가쿠였다.

나는 짐을 들고 배정받은 방으로 가는 내내 들려주는 이 집안에 대한 역사를 머릿속에 기억해뒀다. 다른 자식도 없어 이 가문의 상속은 전부 가쿠가 물려받는다는 이야기까지 기억해버렸다. 가끔 들리는 이야기로는 가문의 거대한 재산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메이드나 집사가 있다고 들었다. 나는 그런 쪽으론 관심도 없었다. 그냥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먹고 열심히 돈을 모으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나 더 흥미가 있는 일이라면 피아노였는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내가 늘 청결유지에 신경을 써야 하는 방은 바로 검은색의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방이었다.

하루만 쉼이라고는 없었다. 방에 짐을 놓고 옷을 갈아입고 나자마자 나는 청소할 것들을 들고 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어보니 고급스러운 장식이 가득하고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이 제법 따가운 그런 방이었다. 생각보다 큰 방 가운데에는 피아노 한 대만이 있었고 마치 이 피아노만을 위해 만들어 둔 방 같았다. 그리고 사실 이 집안의 재력이라면 그럴 것도 같았다. 언제 주인이 돌아올지 몰라 늘 깨끗하게 유지 해둬야 하는 저택의 특성상 나도 얼른 두 팔을 걷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방에 있는 창문을 전부 열고 먼지떨이로 구석구석의 먼지를 털어내고 (사실 크게 청소할 것도 없었다.) 피아노의 덮개를 열고 건반 위에 올려진 빨간색의 천도 걷어내니 마치 반짝반짝하게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반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으니 괜찮겠지? 라는 생각에 흰 건반을 가볍게 눌러봤다. 울리는 소리가 제법 좋았다. 왈츠풍이 좋으려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멋대로 피아노를 쳤는데 문을 닫고 친다는 것을 까먹어서 누가 들어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새로 온 메이드인가?”

“네?”

뒤를 돌아보니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서 있었고 나는 직감적으로 저 사람이 이 저택의 실질적 주인인 야오토메 가쿠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충 봐도 귀해 보이는 옷감으로 만든 옷이나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나를 깔보거나 무시하는 듯한 눈빛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일을 안 하고 딴짓을 하다 걸린 것만 같아서 (사실이지만) 고개를 당당히 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제법 흥미롭다는 표정을 얼굴에 띄고 있었다. 첫날부터 땡땡이치는 메이드는 처음 봤던 걸까? 아니면 어떻게 나를 해고 시킬지 고민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저런 온갖 생각을 하며 땅만 보고 있으니 그의 신발이 내 시야로 들어왔고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마스조에 신….”

“처음 왔는데 이 방을 담당하게 되었다니, 그레이스 부인이 제법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좀 물어보고 싶었다. 이 방을 담당하면 좋은 것인가? 아니 그보다 이렇게 도련님을 앞에 두고 있어도 되는 건가? 이전에 있던 곳에서는 부인의 옆에 있었기에 사실 도련님이나 아가씨 같은 사람들과 거의 마주할 일이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선 뭘 하면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죄송하다고 빌어야 하는 건가? 이대로 해고당하면 큰일인데.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으니 도련님은 제법 의외의 말을 했다.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들어와서 좋군. 앞으로 여기와 내 방을 담당해줬으면 하는데. 그레이스 부인에겐 내가 직접 말해놓을게. 그리고 하고 싶다면 이곳을 이용해도 괜찮고 내 방의 피아노를 이용해도 좋아. 자유롭게 사용해. 다만, 내 방을 사용할 때는 나를 불러줬음 좋겠어. 피아노는 어느 정도까지 칠 줄 아나? 소나타? 소나티네?”

“네…?”

속사포로 할 말을 다 하는 도련님을 나는 그저 멍하게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방을 써도 된다니, 이건 되게 조심해야 하는 발언이 아닌가?

피아노를 의자에 앉은 그는 듀엣곡은 칠 줄 아냐며 물어왔고 칠 줄 아는 게 없다면 자신의 방에 악보가 있으니 그걸 가져다 연습하라고 했다. 청소뿐 아니라 피아노까지 치라는 그는 덤덤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가만 생각해보니 그레이스 부인이 저택에 관한 설명을 할 때 도련님에 대한 설명도 제법 했었다.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었고 어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지만 조금 크고 나서는 받지 않았다고.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저런 사람이라면 피아노를 위한 방을 하나 만들어두는 것도 그답다는 생각이 들 것만 같았다. 사실 피아노보단 노래 부르거나, 춤을 추는 쪽을 더 선호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피아노를 더 이상 연주하지 않는 것일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 너 같은 메이드들에게 인상이 무섭다는 이야기는 많이 듣지만.”

‘인상에 관한 얘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가만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그는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건반 위에 손을 올려뒀다. 그리곤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내가 쳤던 곡을 그대로 치고 있었다. 솔직히 나보다 연주실력은 훨 좋았다. 이건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희고 긴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말 피아노를 치는데 정말 좋은 조건이었다. 손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신이라고 했나. 이 저택에 온 걸 환영해. 부디 열심히 해주도록.”

그렇게 나는 야오토메 가문의 신입 메이드로서 첫 날을 보냈다. 그 첫걸음은 생각보다 당황스럽고, 의아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도련님.”

 

-

 

이후에 알게 된 사실로는 이 집의 실질적인 주인이자 가문의 유일무이한 상속자인 도련님은 그 방을 제법 아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소문이나 그간 본 바에 의하면 그는 굉장히 예의가 바르고 자기주장이 뚜렷하며, 동료나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것이었다. 그의 인성은 굉장히 좋기로 소문이 났지만, 그와 동시에 무서운 표정이 디폴트라는 이상한 소문도 함께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네요. 나쁜 분이라는 이야기는 전혀 없지만, 표정이 좀... 문제인가 봐요.”

“네가 느끼기에도 그런가?”

“저는 잘 모르겠는데 말이에요. 적응해서 그런가 봐요.”

적응한 부분에서 동의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잖나. 그렇네요.

여름이 다 지나가고 있을 끝자락에 처음 와서 어느덧 겨울의 추위를 느낄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참 빨리 지난다. 저택에서의 생활은 제법 즐거웠다. 그는 파티를 많이 여는 편도 아닐뿐더러 어려운 일이 크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나는 왜 이 저택에는 다른 저택에 비해 일하는 사람들의 수가 확실히 적구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일주일에 두어 번 그의 방에 들어가서 피아노를 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임무였다. 그는 주마다 새로운 곡을 부탁했고 나는 틈틈이 새로운 곡을 연습해야 했다. 내가 그의 앞에서 연주를 시작하면 그는 마치 스승에게 배우는 제자의 태도를 취했다.

“근데 도련님. 저보다는 다른 더 좋은 실력을 가진 음악가에게 배우심이 어떠세요?”

“너 정도가 좋은데.”

늘 이런 식이었다. 괜히 사람 심장을 뚝 뚝 떨어지게 하는 대사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도련님과 사랑에 빠진 메이드의 얘기는 아주 아주 가끔 들었지만 주로 메이드 쪽에서의 짝사랑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절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는 말아야지. 늘 이렇게 다짐하지만, 그가 건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건 어렵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황스럽고 의아한 첫날의 연장선인 것만 같았다. 다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내가 생각하고 있고 가지고 있는 감정이 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바쁘다는 건가?”

“저보단 도련님이 바쁘시지 않나요? 저는 이번에 뒷정리만 맡았어요.”

특이하게도 일 년에 몇 번 없을 이 저택의 무도회였다. 말한 것처럼 나는 무도회가 전부 끝나고 뒷정리를 맡아서 그전까지는 쉬어도 된다는 그레이스 부인의 말이 있었다. 뒷정리야 맘 딱 잡고 금방 서로서로 도와서 한다면 일찍 끝나기 때문에 그 전까지 방에서 쉬며 체력이라도 비축해 둘 생각이었다.

“춤은 춰 본 적 있나?”

네? 정말 알 수 없다. 이 사람. 갑자기 춤이라니. 사실 너무 이상한 주제라기엔 무도회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었기에…. 피아노 앞에 가만 앉아있던 그는 성큼성큼 걸어 방문을 닫곤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홱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신호람?

“shall we dance?”

“진심이세요? 저는 한낱 메이드에 불과한 사람인데요?”

“나한테는 아니니까 괜찮아.”

정말 심장이 뚝 뚝 떨어진다.

 

*글에 나온 그레이스 부인은 원작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등장도 하지 않는 오리주의 느낌으로 봐주세요 :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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