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결핍된 것을 찾기 위해 평생을 허덕이며 산다.
제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갈망하는지도 모르는 경우라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무지하다 해도, 무릇 인간이라면 자신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본능이 바라는 것을 향해 움직이기 마련이었지.
제게 비어있는 부분은, 그러니까, 말하자면 ‘안정’과 가까운 무언가라 할 수 있었다.
왕혁은 제 어미와 아비가 누구인지 모른 채 길거리에서 자란 고아였다.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보호자도 없이 뒷골목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절도, 사기, 구걸, 협박…. 어찌되었든 합법적인 일을 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건 모두가 동의할 것이고, 왕혁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하찮은 목숨일지라도 개죽음을 당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더러운 짓이라도 해서 살아남아야지. 사람이 아니라 들개가 되더라도, 결국은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세계니까.
그렇게 시작된 7살 소년의 대담한 사기와 절도는 수도의 슬럼가를 술렁거리게 만들기 충분했지만, 그 소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하앙~! 찾았다! 며칠 전 본 그 꼬마도둑 맞네♥”
왕혁이 10살이 되었을 무렵, 마차에서 내리는 어느 귀부인의 부채를 훔쳐 팔아 치운지 이틀이 지난 어느 밤. 그는 건장한 남자 몇 명과 함께 등장한 부채의 원래 주인을 보곤 제 목숨은 여기서 끝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 겨우 부채 하나 때문에 좀도둑을 찾아올 귀족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은 이제 감옥으로 가는가. 아니면 여기서 사적인 복수를 당해 목숨을 잃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원래도 불투명한 미래가 한 순간 깜깜한 어둠으로 바뀌어 버리다니. 왕혁은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하고 귀부인를 노려봤지만, 상대는 그런 왕혁이 마음에 든 건지 유쾌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영리하고 손재주가 좋던데, 여기서 썩기엔 아깝지 않니잉? 내가 쓸 만한 하인이 필요한데, 우리 집에서 일해보지 않을래? 월급도 따로 줄게♥”
‘진심인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행운에, 소년은 대뜸 의심부터 했었다. 제 물건을 훔친 도둑을 자신의 집으로 들이겠다니. 얼마나 나사 빠진 귀족인가.
하지만 그 합리적인 의심도, 강렬한 갈망 안에서는 빛을 바래는 법이었다.
비바람을 막아줄 집.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음식. 목마름을 해결할 깨끗한 식수. 게다가, 원하는 건 살 수 있는 돈까지 준다니.
비록 수완이 좋아 도둑질과 사기로도 먹고살 수 있는 자신이었지만, 솔직히 이런 짓이 즐거울 리는 없었다. 수입도 불안정하고, 언제 쇠고랑을 찰지도 모르는 뒷골목 인생을 즐기는 미친놈이 세상에 그 어디 있겠나? 자신도 편한 삶만 보장된다면 이러고 살 이유가 없다. 제가 원하는 건, 걱정으로 뒤척이지 않고 발 뻗고 잘 수 있는 평온과 안정이었으니까.
‘애초에 잡아넣을 거라면 지금 당장 그러면 되는 건데, 이렇게 감언이설로 속일 이유도 없겠지.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알 수가 없어.’
자신에게 있어선 딱히 손해 볼 게 없는 거래다. 그렇게 판단해 귀부인의 저택에 들어간 그는 ‘왕천군’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함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귀부인, 그러니까 부채의 본래 주인이자 이제는 자신의 주인인 ‘달기’는 정말로 제 재주가 마음에 든 것인지 일개 하인일 뿐인 자신을 마치 양아들이라도 되는 듯 보살펴 주었다. 약속했던 의식주와 돈을 마련해 주는 건 물론이며, 그럴싸한 교사까지 붙여 여러 가지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했지.
‘왕천이는 원래 머리가 좋으니, 금방 배울 거야!’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달기의 예측대로, 왕천군은 어지간한 또래의 귀족 자제들보다도 우수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글자를 읽고 쓰거나 셈을 하는 것은 물론이며, 정치나 철학 같은 고등학문도 왕천군에겐 그리 어렵지 않았지.
태생부터 비상한 머리. 득과 실을 잘 따지는 현명함.
그리고 밑바닥을 알기에, 없이 살았던 시절을 기억하기에, 평온과 안전을 추구하게 되는 조심성까지.
부와 지위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달기는 제가 주워온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정확하게 간파했고, 이윽고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귀족이 아닌 이상 배울 이유가 없는 것들을 가르쳐 주며 자신의 야망을 말해주었다.
“나는 말이지잉, 이 나라를 원해.”
다소 위험한 발언으로 시작된 달기의 말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어린 나이에 가문을 물려받게 된 자신은 누군가의 부인이 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에 스스로 귀족의 지위를 받게 되었고, 사업과 정치를 이용해 가문을 키워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귀족은 귀족일 뿐. 정상을 원하는 그는 제가 만족하기 위해서는 이 나라의 왕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다 여겼고, 그 과정에서 목적달성을 이룰 도구로 선택된 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했다.
“딱 보자마자 느낌이 왔거든! 그 굶주린 눈동자! 너도 저 위쪽 세계를 동경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앙! 물론 왕천이가 원하는 건 무소불위의 권력이라 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안락함에 가깝겠지만? 어찌됐든! 얼굴도 합격이고 머리도 좋아서, 우리 왕천이를 내 사람으로 들였다. 이거란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정말 양자로 들이기라도 하게?”
“후후. 이미 왕천이는 사실상 내 양자나 다름없는 걸? 그래서 말인데, 엄마 부탁 좀 들어줄래?”
“부탁?”
이런 상황에서 부탁이라니. 척 봐도 쉬운 부탁은 아닐 것 같다. 왕천군은 조심스레 반문했고, 달기는 걱정 할 것 하나 없다는 듯 편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아, 이것 좀 읽어 보렴♥”
짝짝. 가볍게 박수를 치며 웃은 달기는 종이뭉치를 내밀더니 우아하게 턱을 괴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머리가 좋은 만큼 촉도 좋은 그는 대체 이 은인이자 어미 같은 여자가 꾸미고 있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님을 직감하고 조심스럽게 종이들을 넘겨보았다.
누군가의 인적사항. 주소. 주의사항과 경고.
다소 묘한 내용들이 적힌 종이를 뚫어져라 보던 왕천군은, 주의사항이 적혀있는 종이를 차근차근 읽다가 물었다.
“집사?”
“응, 집사!”
“그러니까, 나를 누군가의 집에 집사로 보낼 생각이다?”
“그래앵♥ 거기 적혀있는 그 귀족의 집에!”
갑자기 자신을 다른 집에 팔아치우겠다?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이렇게 읽을거리를 잔뜩 주면서 부탁하지 않아도 되겠지. 매매라면 팔아치울 물건은 내버려 두고 구매자와 판매자만 이야기해도 되지 않던가. 그렇다면, 제 주인은 대체 무슨 짓을.
“…잠깐, 설마….”
영특하다는 것은 때로는 저주같이 느껴지는 법이었다. 왕천군은 주의사항과 경고를 모두 읽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달기를 보았고, 달기는 그 의심에 쐐기를 박듯 화사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귀족 아가씨를 한 명 꼬셔주면 좋겠어. 우리 왕천이 없이는 못 살 정도로 푹 빠지게 말이야!”
아아, 제게 이걸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나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워져 길러진 입장에서, 그리고 하인 되는 입장에서 정해진 선택지는 단 둘뿐. 승낙하거나, 내쳐지거나. 단지 그것뿐인 상황이라면, 개죽음은 사양인 자신이 정할 길은….
‘나도 팔자 한 번 사납네.’
물론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자신이니, 이렇게 한탄하면서도 결국 떠넘겨진 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왕천군은 뻔히 정해진 대답을 뱉는 대신, 달기가 챙겨준 종이들을 주머니에 쑤셔 넣을 뿐이었다.
‘순진한 계집애 하나 꼬드기는 건 일도 아니지.’
그래.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달기가 준 서류의 인적사항만을 읽었을 때 까지만 해도, 이 일은 너무나도 간단하고 손쉬운 싸구려 사기극이며 자신은 그 무대의 완벽한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가시덤불 속에서도 살아갈 길을 찾던 제가, 바깥출입조차 제한받는 온실 속 화초를 꺾는 게 힘들 리 있겠는가. 심지어 자신은 다행스럽게도 얼굴이 꽤 준수한 편이었다. 겸손을 거두고 감히 말하자면, 얼굴로만 따지면 어지간한 부잣집 도련님들도 고개를 숙일 정도였으니까.
기술, 외모, 의욕. 모든 것을 가진 제가 실패할 리 없다. 왕천군은 자신만만하게 그리 확정짓고 이 나라의 태사, 문중의 집에 첫 발을 디뎠다.
“달기 후작님의 추천인이니 쓸데없는 짓은 안 할 거라 믿지만, 혹시나 해서 말하지. 손버릇 나쁜 짓을 하거나 추문을 만들면 바로 쫓겨날 줄 알아.”
왕천군을 맞이하고 저택 내부를 안내해준 집사장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는 겉으로만 알겠다고 할 뿐 전혀 상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 일만 성공하면 달기는 지금보다 더 큰 영광과 부를 거머쥘 테고, 그 중 일부분은 제 몫이 될 테니 별 관심도 없는 이의 잔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너는 떠들어라, 나는 이 집 아가씨나 꾈 궁리를 할 테니.’ 하지만, 그렇게 건방진 생각을 되뇌는 것도 잠시.
“어라, 장규. 그 사람은…?”
“아. 아가씨!”
아가씨. 집사장이 답한 상대가 제 타깃임을 눈치 챈 그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아.’
자신도 모르게 탄식할 뻔 했던 입을 급히 다물고, 스르륵 멈춰서고 말았다.
서류에 붙어있는 그림에서 봤던 그 얼굴이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도, 이목구비의 모양새도. 분명 제가 눈여겨 두었던 아가씨가 맞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그 초상화, 터무니없는 실력의 화가가 그렸나보군.’
아니. 어쩌면 화가도 그려놓고 제 실력을 탓하진 않았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모델을 두고 이정도 그림밖에 못 그리다니, 라고 말이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집사입니다! 왜, 전에 일하던 녀석이 갑자기 사라져서 일손이 부족해졌잖습니까? 그래서 인원충당으로….”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아버님께 들었던 것 같아.”
장규의 말에 답하는 아가씨의 목소리는 아직 앳된 티를 못 벗은 얼굴과 달리 퍽이나 성숙한 면이 있었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음색은 맑은 것이, 꼭 커다란 종이 울리는 것과 같았지. 여기서 왕천군은 또 다시 한탄하고 말았다. 어째서 글과 그림에는 목소리를 담을 수 없는 것인가, 하고.
“저어, 이름이…?”
멍하니 아가씨를 바라보던 왕천군은 제 쪽으로 향하는 석류 색 눈동자 한 쌍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도 요란하게 들렸다.
“…왕천군 입니다.”
“왕천군…. 응. 앞으로 잘 부탁해. 왕천군.”
새벽에 지는 달처럼 희미하게 웃은 아가씨는 고개 숙여 인사하곤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뱉은 집사장은 아가씨의 그림자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도로 왕천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분이 담운 아가씨야. 주인님의 따님이지. 아가씨 방은 아까 알려줬지? 넌 별로 다가갈 일 없겠지만, 혹 아가씨를 뵈어야 할 일이 있거나 아가씨가 부르시면 거기로 가면 돼.”
“…갈 일이 없다는 건?”
“그걸 질문이라고 해? 아무리 사용인이라도 새파랗게 젊은 사내자식이 아가씨 방에 막 드나들면 좋을 리 없잖아? 메이드들도 조심해서 들어가는 판에.”
‘자기도 새파랗게 젊게 생겨놓고.’ 실제 나이는 모르지만 외모만 봐서는 그리 나이가 들어보이지도 않는 장규를 속으로 욕한 왕천군이 살짝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순탄치 않을 것 같다.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해 하던 그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겨우 얼굴을 한 번 본 것뿐인데 어째서 제 확신은 그리도 물렁해졌는가. 분명히 서류로 골백번 본 인물인데. 그저 눈을 마주친 것뿐인데, 말을 주고받은 것뿐인데.
‘주책이군.’
유혹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괜히 이런 감정이 드는 거겠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작은 한숨을 내뱉은 그는, 그렇게 미심적한 마음을 품은 채 달기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 나갔다.
비록 멀리서 지켜보는 것뿐이더라도, 같은 지붕 아래 지내게 되면 많은 것이 보이게 된다.
아가씨는 아침 7시에 일어나고, 8시에 아버지인 문중과 식사를 한다. 10시 쯤 가정교사가 와서 공부를 가르쳐주고, 1시에 점심을 먹은 후에는 숙제를 하거나 여가생활을 즐기며 자유시간을 가진다. 저녁식사는 7시 쯤, 조식 때와 마찬가지로 문중과 함께 먹고 독서 후 10시 이전에 잠에 든다. 참으로 평범한 귀족 영애의 하루이긴 했지만, 문제는 그의 목표물인 아가씨가 그다지 평범하지 않았다는 거였지.
앉아있을 때는 백합 같고, 서서 걸으면 흰 튤립 같다.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때문인지 본래 성품이 올곧아 그런지 모르지만 예의도 바르고, 그런 와중에도 아랫것들에겐 살갑게 굴어 사람의 경계심을 풀게 만드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했지. 마치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완벽한 아가씨의 모습은, 그저 가만히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소소한 재미가 되곤 했다.
적당한 양과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업무들. 괜찮은 복지. 좀 재수 없지만 크게 거슬리게 굴진 않는 상사와 하루에 서너 번은 눈인사를 하는 아가씨까지. 여기까지만 보자면 그의 집사생활은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것 같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벌써 한 달 째인데, 아직 대화도 제대로 못 해봤군.’
제가 그냥 여기 일하러 온 것이라면 새장 속의 새를 구경하듯 아가씨를 지켜보고 곱씹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자신은 저 새를 새장에서 꺼내 들고 도망쳐야 한다는 임무가 있었다. 그것도 그냥 난폭하게 낚아채는 게 아니라, 새가 알아서 제 손에 올라타도록 잘 꾀어야 했지.
‘날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이건 자의식 과잉이 아니다. 아무리 모두에게 상냥한 아가씨라고 해도, 별로 관심도 없는 사용인이 눈을 맞춰오는데 인사 이상의 관심을 표할 이유가 있던가? 적어도 제가 아는 다른 귀족들은 그러지 않았다. 게다가 그 미소란. 그 시선이란….
‘안녕, 일은 할 만 해?’ ‘머리가 꽤 기네, 뒷머리는 묶어도 되겠다.’ ‘전에 있던 집에서도 집사로 일했어?’ ‘재미있는 이야기 해줘.’ ‘왕천군.’ ‘밖에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환청인지 정말 고양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어.’
마차를 타고 갈 때. 계단에서 잠깐 마주쳤을 때. 티타임이 되어 메이드랑 같이 차와 다과를 가져갈 때. 우편물을 그의 방으로 배달할 때 등등…. 아주 사소한, 찰나의 마주침 마다 아가씨는 저런 말들을 하며 웃었고, 때로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질문도 하곤 했다.
저택에 몇 없는 제 또래의 사내놈에 대한 본능적 호의인가, 아니면 신입에 대한 정당한 호기심인가. 어느 쪽이던 제게 나쁠 건 없는 감정이었다. 상대를 꾀야 하는 제 입장에선, 어떤 관심이든 그저 고마울 뿐이었으니까.
“저기, 신참!”
아가씨의 관심을 어떻게 이용해야 좋을까. 그걸 연구하며 저장고 안의 와인 수를 세던 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여기 온지 한 달 밖에 안됐다 하더라도 ‘신참’이라니. 물론 일일이 이름을 부르는 쪽이 친한 척 하는 거 같아 더 기분 나쁘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참이라는 대명사로 불리는 것이 좋을 리 없었다.
“무슨 일이야?”
어차피 같은 집사라면 존대를 할 것도, 친절하게 대한 것도 없다. 그리 생각하는 왕천군은 자신을 부른 집사에게 다소 건방지게 답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상대는 이 싸늘한 대답을 트집 잡지 않았다.
“그 일 끝나면 3층으로 와서 아가씨 외출 준비 좀 도와! 원래는 왕마가 같이 가려고 했는데, 주인님이 일이 생기셔서 그쪽으로 따라갔거든.”
“…아, 그래?”
이게 웬 떡이냐. 될 놈은 된다고 하더니,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기회가 와버릴 줄이야. 왕천군은 귀까지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겨우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야 말로 무언가 건수를 만들어야 한다. 집 안에서도 건수는 얼마든지 잡겠지만, 외출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인간은 분위기를 타는 생물인 만큼, 장소는 생각보다 중요하니까.
“아, 왔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위로 올라가니, 외출복을 차려입은 채 기다리고 있는 아가씨가 자신을 반긴다. 아가씨의 옷매무새를 마지막으로 점검해주던 메이드는 왕천군의 등장에 슬쩍 눈썹을 까딱이곤 가방을 넘겨주었다.
“아가씨,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응. 금방 다녀올게. 가자, 왕천군.”
얼른 오라는 듯 고갯짓 한 아가씨는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간다. 간만의 외출이라 그런 걸까. 오늘따라 그 꽃 같은 얼굴에 더 생기가 도는 것 같다.
크기는 작은 주제에 무엇이 들어 그렇게 무거운지 모를 가방을 들고 마차까지 온 왕천군은, 아가씨를 마차 안으로 에스코트 한 후에야 상대가 왜 그리 신이 났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오늘, 고우건이 왕마를 대신해서 날 따라가 준다고 했는데 고집을 좀 부렸어.”
“응?”
“너랑 같이 외출하고 싶다고 말이야. 나, 고집은 잘 안 부려서 가끔 이렇게 떼를 쓰면 다들 받아주곤 하거든.”
아, 이렇게 고마울 수가. 왕천군은 마부가 앞에 있다는 사실도 잊고 웃고 말았다.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보다는 열린 문에 들어가는 게 쉽지만, 이 경우는 문도 열어놓고 손짓까지 하는 경우가 아닌가.
만약 상대가 제 고용주가 아니고, 이곳에 단 둘뿐이었다면, 망설이지도 않고 넘어뜨렸을 텐데. 과격한 생각을 잠깐 접어둔 왕천군은 마차가 시내에 도착할 때 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저랑 외출하고 싶으셨습니까?”
“응. 왕천군이랑 친해지고 싶었거든.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하고.”
“그거 영광이네요. 겨우 저 같은 하인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하인도 사람이잖아? 사람이 사람끼리 친해지고 싶은 건 이상하지 않아.”
‘머리가 꽃밭이군.’ 자신도 모르게 그리 답할 뻔 했던 왕천군은 애써 하려던 말을 삼켰다. 역시 생긴 건 눈에 띄게 아름답다 해도, 제 아가씨도 머릿속은 다른 영애들이랑 마찬가지로 순진하기 짝이 없다. 저 세상 물정을 모르는 다정함이란! 이런 영혼은 뒷골목에 버려지게 되면 분명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게 분명하다.
“아가씨는 모든 하인들에게 관심을 주니까, 착각하지 마.”
제가 너무 웃고 있었기 때문인가. 앞만 보고 있는 줄 알았던 마부가 슬쩍 작은 목소리로 딴죽을 걸었다. ‘어쩌라고’ 마음속으로만 대답한 그는 아무것도 못 들은 사람 마냥 마차가 멈춰서기 무섭게 땅으로 발을 디뎠다.
들뜬 아가씨를 에스코트 하며 오랜만에 누비는 시내의 풍경이, 어쩐지 예전과는 달라 보인다.
분명 가게도, 거리도, 그다지 변한 것은 없는데 어째서 그렇게 느껴질까.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렇다고 하기엔 외출하지 못한 기간이 긴 것도 아니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달기랑 같이 온 거리인데, 겨우 두 달 사이에 그렇게 감상이 변할 리 있겠는가?
‘혹시.’
이 아가씨 때문인가. 인정하기 싫지만, 그렇게 밖에 생각 할 수 없다. 왕천군은 주문해 놓았던 모자를 받아쓰고 환하게 웃는 담운을 보며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이 순진하고 착해빠진 계집애가 뭐가 그리 특별하다고 자신은 이리도 감상적이게 되는 것인가. 얼굴이 좀 곱상한 것 때문이라면, 달기도 충분히 아름다웠는데 굳이? 물론 제 아가씨의 아름다움은 달기의 아름다움과는 조금 다른 멋이긴 했지만 말이다. 달기가 요염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라면, 담운은… 어딘가 다가가기 힘든 음울함이 절벽 위 꽃처럼 보이게 하는 가련한 이미지에 가까웠다.
“왕천군, 저, 이 꽃이랑 이 꽃 중 어떤 게 더 좋을까? 아버지 책상 위에 꽂아드리고 싶은데.”
…물론 성격은 생긴 것과 달리 어두운 구석이라곤 별로 없었지만, 뭐, 이미지와 성격은 꼭 정비례 하는 건 아니었으니 어쩌겠는가. 달기도 애초에 생긴 건 아름다워도, 뱃속이 시꺼먼 사람이었는데.
“아가씨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는 건?”
“그래도 될까?”
“어르신이라면 아가씨가 생각해서 고른 거라면, 그것만으로도 기뻐할 테니까요.”
“…그러면, 왕천군은 이 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좋아?”
갑자기 제 취향을 물어오다니.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왕천군은 아가씨의 품에 있는 같은 품종에 색만 다른 꽃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붉은 색 꽃잎을 가진 꽃을 선택했다.
“이 쪽.”
“그래? 빨간색 좋아해?”
“그런 건 아니지만, 아가씨 눈 색이랑 같아서.”
그 대답은 무의식 적인 칭찬에 가까웠다. 의식적으로 가까워지기 위해 뱉은 말이 아닌, 아랫것이 모시는 이에게 당연히 해야 하는 칭찬 같은 것 말이다. 뒷골목에서 살 때는 이런 말투는 정말 질색이었고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싫었지만, 달기 밑에서 자라다 보니 어느새 입에 붙어버려 지금 와서는 싫어도 내뱉게 되는 그런 말. 분명, 그런 말이었는데,
“…정말?”
아. 어째서 우리 순진한 아가씨는 그런 것도 모르고.
저 말을 진심으로 믿고, 그렇게나 수줍게 웃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럼 둘 다 살래. 보라색은 아버지 드리고, 빨간색은 너한테 줄게.”
왕천군이 뭐라 해명할 틈도 없이 아가씨는 꽃을 들고 계산대로 가버린다. 멍하니 멀어져 가는 작은 그림자를 보고 있던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탄식하다가 그대로 실소가 터져버렸다.
바보 같은 아가씨. 어떻게 이렇게 단순할까.
하지만 정말로 곤란한 건, 그 멍청한 언행에 귀엽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내 팔자야.’
달기만 아니었다면 이런 곤란함을 겪을 일도 없었을 텐데. 뒷골목에서 구해준 값이라 생각하려고 해도 너무 과하지 않은가. 제 평생 누군가를 귀엽다 생각한 적이 없는데. 사람이 아니라 동물의 새끼에게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되다니.
‘…돌겠네.’
그냥 지금 데리고 튀면 안 될까. 제가 자식 같다고 한 달기니, 이 정도 독단적 계획변경은 눈감아 줄 법도 한데. 애초에 푹 빠지게 한 게 아니라도, 이정도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 몸부터 납치해도 되지 않은가.
위험한 상상을 하며 마른침을 삼킨 왕천군은 그 눈동자 보다 더 붉어진 뺨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담운에게 가방 속에서 꺼낸 지갑을 내밀었다.
배가 부르니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이지, 정신 차리자. 왕천군. 아니, 왕혁. 너는 결국 한 번 추락하면 다시 뒷골목의 잡배가 되어야 하는 몸이다. 먹어보지 못한 과일이라고 덥석 물었다가는 낙원에서 추방당하고 만다.
아가씨와의 외출에서 돌아온 왕천군은 자신의 위치를 되뇌며 선물 받은 꽃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시들어버리면 끝인 것에 눈멀어, 제가 평생 추구하던 안정을 걷어 찰 수는 없다. 마음을 다잡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 꽃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만약 버린 걸 들키게 되면 그간 쌓아온 신뢰와 호감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렇다고 방에 두기에는, 볼 때마다 계속 그 미소가 생각날 것 같아서.
‘…돌려줄까?’
아예 아가씨에게 도로 줘버리는 편이 나을까. 마음은 고맙지만, 제 방에는 딱히 둘 곳도 없으니 아가씨 방에 두어달라고? 사용인이 사적인 선물을 받는 건 좋지 않으니, 어르신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도로 받아달라고 하면 착하디착한 제 아가씨라면 기꺼이 받아줄 텐데.
잠깐 고민하던 그는 결국 포장되어 있던 꽃을 풀어 잘 정리한 뒤 담운의 방으로 향했다. ‘새파랗게 젊은 사내자식이 아가씨 방에 막 드나들면 좋을 리 없잖아?’ 언젠가 집사장이 한 말을 잊지 않았던 왕천군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하게 방으로 올라갔지만, 그가 아가씨를 발견한 곳은 굳게 닫혀있는 방문 너머가 아니었다.
“흠?”
창밖에서 서성이는 새하얀 원피스는, 분명 제 아가씨가 즐겨 입는 잠옷과 같은 모양이다.
왕천군은 유령처럼 정처 없이 뒤뜰을 떠도는 담운을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짓궂게 웃어버렸다. 지금 꽃 같은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저기, 길 잃은 새끼양이 목덜미를 내놓고 방황하고 있지 않나.
아가씨의 방 앞에 꽃을 놓아둔 그는 뛰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빠른 걸음으로 뒤뜰로 내려갔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두리번거리고 있는 담운은 누군가가 자신을 쫓아오는 것도 모르는지 꽃과 나무가 우거진 정원 쪽으로 달려 나간다.
아아. 얼른 달려가서, 목을 물어뜯고 싶다.
본능적인 욕구에 이끌리는 발걸음이 조금씩 거칠어진다. 아까 전까지 정신 차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던 자신은 어디로 갔는가. 구둣발자국 소리가 커지는 것도 억누르지 않고 담운을 쫓아간 그는, 결국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던 아가씨를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힉!”
“아.”
“…아.”
몸을 잔뜩 움츠리며 놀랐던 담운은, 자신을 쫓아온 사람이 누군지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우습기도 하지, 제 목을 물어뜯으려고 달려온 맹수를 보고 안심하다니. 이러니 곱게 자란 아가씨란 안 된다는 거다. 두 눈 가득 차오른 긴장이 흐릿해지는 걸 확인한 왕천군은 그제야 제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충동을 억누르고 신사적인 걸음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뭐 하고 있습니까? 곧 주무실 시간일 텐데.”
“…고양이….”
“아?”
“고양이 소리가 들려서….”
고양이? 그러고 보니, 정원을 돌아다니는 길고양이가 몇 마리 있긴 했지. 원래라면 보이는 대로 정원사가 쫓아내는 모양이지만, 사용인들이 잠드는 밤에는 몰래 들렀다 가는 경우도 있다는 소릴 다른 집사에게 들었던 것도 같다.
“얼마 전에도 고양이 소리가 어쩌고 하시더니. 기어이.”
“미, 미안해. 그냥, 조금만 구경하고 들어가서 자려고 했는데….”
“그래도 잠옷 바람으로 나오면 곤란하지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사실 이미 제가 봤으니 충분히 곤란해진 상황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것도 보통 큰일이 아니었지. 자신은 충직한 집사가 아니라, 이 저택에 당신을 꾀러 온 불순한 스파이였으니까.
“집안사람들 외엔 볼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품위를 지켜야지요. 그렇게 목을 훤히 드러내고, 겉옷도 없이….”
젠장. 입이 자꾸 말라온다. 흠집 하나 없는 목선을 자신도 모르게 시선으로 훑게 되어서, 얇은 원피스 아래로 뻗어 나온 가느다란 다리가 눈이 부셔서.
“야옹.”
두 사람의 대화를 자른 것은 사랑스러운 울음소리였다. 가늘고 높은, 어린 것의 우는 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린 왕천군과 담운이 발견한 것은 새까만 털을 가진 새끼고양이였다.
“아, 찾았다.”
말하는 걸로 보아서는 이미 구면인 것일까. 담운은 살가운 얼굴로 새끼고양이를 안아들고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쳇.’ 상대는 눈치 채지 못하게 방해꾼을 향해 작게 혀를 찬 왕천군은 마른세수로 표정을 가다듬은 후 말을 이어갔다.
“언제부터 길들였던 겁니까?”
“길들여? 이 애 말이야? 딱히 길들인 적은 없어. 먹을 거라면 몇 번 씩 줬지만….”
“그런 걸 보통 길들인다고 합니다.”
저렇게 자각도 하지 않고 길들인 생물이 담운에겐 몇이나 있을까. 문득 제가 저 고양이나 다름없게 느껴진 왕천군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름은?”
“안 지어줬어. 이름은 함부로 지어주는 게 아니라고, 아버지가 그랬어.”
“그거 현명하네요. 거둬 책임질 게 아니라면 이름은 지어주는 게 아니죠.”
“으음.”
왕천군의 말을 들은 담운은 고양이와 상대방을 번갈아 보다가, 슬그머니 물었다.
“너는 누가 지어줬어?”
“…뭘?”
“이름말이야. 왕천군이라는 이름.”
이 상황에서 그런 게 궁금한가. 아니면, 궁금할 수밖에 없을 만큼 제가 좋은 건가. 악의 없는 호기심에 눈썹을 까딱인 그는 별달리 문제될 것이 없다 생각해 솔직하게 대답해줬다.
“옛날에 있던 집의 주인님이.”
“그래? 그럼, 거기서 일하기 전엔 이름이 없었어?”
“있긴 했지만, 그걸 지어준 건 누군지 모릅니다.”
“궁금해. 옛날 이름.”
‘괜찮으면, 가르쳐 줄래?’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밤바람에 단내를 풍기며 녹아든다.
달빛도 제대로 닿질 못하는 어두운 정원. 주변 가득 핀 꽃에서 나는 향기도 잊게 하는 단내에 숨통이 확 조여든 왕천군은 메말라오는 입술을 물어뜯는 걸 그만둘 수 없어 목소리를 내뱉었다.
“왕혁, 이라고 했습니다.”
“…왕혁….”
타인의 목소리로 저 이름을 듣는 건 꽤 오랜만이다. 뒷골목의 작은 사기꾼. 무엇이든 훔치고, 신사숙녀를 등쳐먹던 불안정한 과거 속의 자신의 이름.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하필 저 목소리라니.
“나는 이쪽이 더 좋은 걸.”
“허?”
“왕혁. 왕혁…. 으음, 혁이라고 불러도 돼? 이게 제일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이것 봐라. 분명, 본인 입으로 이름은 함부로 지어주는 게 아니라 해놓고. 자신은 길들인 적이 없다고 해놓고. 말하는 것과 다르게, 자신의 아가씨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본인을 베어 물기 위해 온 들개를 길들이려 하고 있다.
수줍은 제안에 바로 답하지 않고 우선 주변을 살핀 그는, 비뚜름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가씨 좋을 대로.”
“정말?”
“대신.”
조건이 있다. 천성이 무구하지만 그 무구함이 오히려 외설적인 당신이 지켜야 할 조건이.
자꾸만 더운 숨이 나오는 입을 거칠게 손등으로 훔친 왕천군은 아가씨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달기의 손에 의해 한번 길들여진 후였던 그는 제가 원하는 것을 위해 목줄에 매여 있던 것이었지, 야생성을 잃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즉, ‘원하는 것’이 바뀐다면…. 주인이 내린 명령 같은 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들짐승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 달기는 아마 그걸 모르고 있기에 자신을 여기로 보낸 것일 테고, 그것은 곧 위대한 후작님의 중대한 실수가 될 것이다.
“나를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면 각오해야 할 거야, 아가씨.”
‘이쪽은 평생 추구하던 평안을 포기하고 당신을 고른 거니까, 그쪽도 그 정도 각오는 해야지.’
드러난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고 중얼거린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새하얀 피부에 입을 맞추었다.